나의 시 31 4월 그 가슴 위로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23), 나의 무비즘 (29)
1989-04 / 1989-05 / 1990
박석준 /
4월 그 가슴 위로
오전인데, 교실의 아이들이 나하고 인사를 나누었을 뿐
말없이 앉아 있다. 4·19라 그런가,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이 4·19인데, 내가 노래 하나 불러줄까?”
“예.” 예전과는 달리, 짧게 반응했을 뿐 움직임도 말도
거의 흐르지 않은 조용함, 침울함을 1분쯤 느껴본 뒤,
나는 목소리를 흘려갔다.
“이젠 우리 폭정에 견딜 수 없어 자유의 그리움으로……
사월 그 가슴 위로…… 통일의 염원이여.”
박수 소리가 흐르는데, “한 번 더 불러주세요.”
하는 소리가 여러 곳에서 났다.
나는 다시 <4월 그 가슴 위로>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선생님의 잔잔한 목소리가 꼭 4월 그날로 돌아가
있는 듯한 기분을 슬픈 기분을 느끼게 했어요.”
라고 다윗이 소감을 말했다.
밤, 나는 누워, 4월 그 가슴 위로……, 생각을 흘렸다.
“날짜는 안 치는 게 좋겠죠?”
재원이 작성한 글을 찬웅이 다 쳤음을 알 수 있었다.
“대호하고 창석이, 둘이 갔다 와라. 나랑 갔던 곳 알지?”
11시 반 대호와 창석이 돌아왔을 때 방안에는 애들이
작성한 열두 장의 대자보가 접쳐져 있었다. 둘은 각각
천 장씩으로 묶인 복사물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는데,
곧바로 비슷한 양의 여섯 더미로 나누었다.
대자보를 여섯 장씩, 풀칠 도구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
가방 두 개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찬웅이 주의를 주었다.
“정한 대로 나하고 창석이, 대호는 3호 광장 위쪽으로
돌 테니까, 상일이, 광휘, 재원이는 아래쪽으로 돌아라.”
그들은 조심하라는 나의 말을 듣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방안을 정리하고서, 이불 위에 앉았다.
창! 창문 밖의 어둠, 그 속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형태가
뇌리에 어른거리며 나의 마음을 쓰게 하였다.
‘깡마른 상일이는 나처럼 아픈데, 괜찮을까?
일하는 사람이 많고 수시로 손님이 찾는 농집이어서,
아이들이 출입해도 괜찮을 거라고 방을 정했는데…….’
새 자취방에서 생각하다가 성명서를 떠올리게 되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순수한 학생들이…… 소위 평준화
해제라는 악습을 반복하는……. 통일염원 45년 5월
참교육 실천을 위한 목포 고등학생 연합회
내 마음에는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성태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대호가, 목고련에서는 이런
문제는 나서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전해줬을 뿐.’
학교 비합법 조직인 ‘더불어’라는 이름을 내걸어서는
안 될 일이고. 해서 또다시 모임의 이름을 지어
성명서를 내는 행위를 하게 되었는데,
나의 생각이 깊어가 새벽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일과 창석이 2시 조금 넘었을 때 돌아왔다.
“찬웅이 형, 광휘, 재원이하고 3호 광장에서 헤어졌어요.
성명서는 대문이나 셔터 속으로 밀어넣었어요. 대자보는
MBC 벽하고, 시장 입구, 학교 앞 삼거리, 교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과 동쪽 출입구 벽에 붙였습니다.”
20일, 아침 동쪽 출입구 안벽 대자보와 성명서를 보며
서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리고 교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 벽에 붙은 대자보를 뜯고 있는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후, 목포역 광장에서 개최된 평준화 해제 반대
집회에는 교사·학생·학부모 등 2만여 명이 참가했다.
5월 26일 나는 퇴근 후 바로 2층 카페 세잔느로 향했다.
세잔의 그림 한 장 걸려 있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 길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대호가 6시 10분경에 현국과 한 아이와 함께 나타났다.
조직 자주교육 쟁취 고등학생 협의회를 결성했다고 하고,
“전교조 투쟁을 지원하려고요. 목고련이 말만 연합회지
학생회장단 모임체로 전락하고 말았거든요.” 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조직은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 둘은 어떻게 온 거냐?”
상황을 파악하게 된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고교 운동의 방향과 방법 등을 들어보러 왔습니다.”
미소를 짓는 현국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고협 학생들은 7월 7일 시내에서 데모를 했다.
어떤 고1 아이들이 6월항쟁 후, 친절하게 다가왔다.
‘그 애’ 재원이 자취방으로 찾아온 후, 대호와,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창석을 데리고 왔다.
비교고사 거부 데모 후 대호가 성태를 소개했다.
2학년 땐 5·18 기념식 치를 권리 보장 및 직선제 학생회
건설 데모를 하여, 재원, 성태, 대호, 다윗이
정학을 맞은 후, 재원이 다윗을 소개했다.
나는 상일을 처음 만난 날 자취방에 데려갔고
상일은 팔씨름을 제안하여 져주었다.
내가 고등학생 연합회의 필요성을 밝혀, 재원, 대호, 성태,
창석이 주축이 되어 2학년이 끝난 날 목고련을 만들었다.
그리고 3학년 진급 후 재원이 광휘를 소개했다.
재원, 성태, 대호, 다윗이 ‘더불어’라는 학습 투쟁 조직을
만들었다. 자고협이 생긴 후 5월 말경
“선생님이 나의 의식을 구속해가는 것이 싫습니다.”
라고 말한 후 성태가 나에게서 떠났다.
나는 8월에 해직되어 먼 곳을 떠났다.
다음해 봄, 점식이 찾아와 빛을 좋아하는 매우 가벼운
서른세 살인 나를 업고 가끔 광주 시내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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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고련 : 1989년 2월에 학생들이 결성한 목포고등학생연합회.
* 자고혐 : 박재원 열사(1971~2002), 서다윗, 김대호, 박광휘, 배상일, 이창석, 김현국이 박승희 열사(1971~1991) 등과 논의하여 1989년 5월 26일에 결성한, 고교생의 전교조 투쟁을 주도한 ‘자주교육쟁취 고등학생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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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오후 8:07⁓2020.04.13. 11:58 <원작 원본> (세잔느/밀어넣었어요)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오교정: 세잔, 밀어 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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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9.4.19. (1연)
1989.5.20. (2연)
1989.5.26. (3연)
1989.8.14.(해직) ⁓ 1990.봄 (4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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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객관적인 해석
「4월 그 가슴 위로」는 실존주의 앙가주망 경향의 글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재현한 리얼리즘 기법도 사용된 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글엔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과 사정을 시각적 심상을 강화하는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한 무비즘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 나누었을/흘려갔다/흐르는데/흘렸다/내려놓았는데/나누었다/집어넣었다/돌아라/밀어넣었어요/벽에 붙였습니다/다가왔다./업고) ― 이것은 시 형식의 글에 적용하는 나의 표현 특징이다.
이 글엔 또 다른 특징들이 있다. 한국의 시 형식의 글에서는 매우 드문, 고등학생이 사회운동을 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리얼리즘 경향이 반영되었다는 점과 그럼에도 모더니즘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 한 특징이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깡마른 ⁓ 정했는데……’, ‘성태는 ⁓ 전해줬을 뿐.’)과 유인물 글자를 그대로 적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흐름을 전환시킨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선생님이 나의 의식을 구속해가는 것이 싫습니다.”라고 말한 “성태”와 말의 지향점인 “나”, 이 둘 다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 구속을 하고 자기 길을 선택한다. 이 글에서 ‘빛’은 ‘구속’에 반대되는 말이며 ‘실존’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 글엔 실존주의가 반영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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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주망, engagement
인간이 사회·정치 문제에 관계하고 참여하면서, 자유롭게 자기의 실존을 성취하는 일. 사르트르의 용어임. 사회 참여. 현실 참여. 자기 구속(自己拘束).
참여(參與)라는 의미의 프랑스 실존주의학파의 용어이다. 원래의 말뜻은 담보, 도박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지상주의 문학에 대하여 사회·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내세운 문학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작가는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고, 독자는 폭로된 대상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며, 따라서 작가나 독자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앙가주망 문학 : 문학을 통하여 사회 문제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 문학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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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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