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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25), 리얼리즘 (3), 나의 무비즘 (31) 7·9대회 / 박석준

나의 33 7·9대회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25), 리얼리즘 (3), 나의 무비즘 (31)

1989-07-09

박석준 /

(원작 교정: 3)

7·9대회

 

 

  78일 저녁 7, 전 조합원 32명이 학교로 돌아왔다.

  1층인 미술실에서 전 조합원 긴급회의가 진행된 후,

  합법성쟁취 범국민대회에 참가할 19명만 남았다.

  “지금부터 출정식 겸 전야제의 시간을 갖기로 하겠는데,

  우선 이 문건들루터 숙독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성진 선생의 말에 사람들은 행동지침을 숙독해갔다.

  전원 연행 각오할 것, 상황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것,

  소속 신분을 밝히지 말 것 등을 외우고,

  출정식 및 전야제의 행사로 들어갔다. 토요일 밤 10시에.

  불을 끈 미술실에 19명이 초에 불을 붙여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19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움직임의 소리가 퍼져 흘렀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정열과 각오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교조여 영원하라!” 외침이 어둠을 뚫고 흘렀다.

  도는 것을 멈추고서 우리들은 결의문을 낭송했다.

  교사출정가를 부르면서 한 손에 촛불을 들고 한 손은

  앞 사람의 어깨에 걸친 채 다시 원을 그리며 돌았다.

 

  9, 아침에 목포에서 출발한 대절버스가 휴게소에 닿자,

  곧 나는 적힌 번호에서 숫자 하나씩을 빼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디냐?”

  “한강 고수부지.”, “알았다.”

  간단한 말로 삼형과 통화한 뒤, 쪽지를 버렸다.

  12시 무렵에, 대열을 이룬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강이 있는 곳으로 뻗은 내리막길로 막 들어섰는데

  “제야!” 소리가 다가와, 뜻밖에 큰형을 볼 수 있었다.

  “니 셋째 형은 내려가다 만날 게다.

  나는 여기서 상황을 살필 테니까, 어서 내려가 봐라.”

  고수부지 내리막길 끝에서 삼형이 나를 불렀다.

  “저쪽이다!” 삼형의 소리가 들리더니 마이크 소리가 났다.

  나는 사람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윗길에 줄줄이 서 있는

  전경차와 내리막길로 오는 전경들을 확인했지만,

  뛰기 힘든 나의 가는 다리 때문에 나와 삼형은 걸어갔다.

  마이크를 중심으로 원을 이룬 채 마이크 소리에 따라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

  하고 구호를 외쳐댔다. 전경들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와아!” 함성 후 구호를 외치며 중앙 부분에서부터

  사람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원형으로 누운 사람의

  손과 팔뚝에 참교육글자들이나 전교조 마크가 새겨진

  천조각이 흔들거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아악!” 하는 바로 옆 여자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나의 몸이 하늘에 떠 있었다.

  전경 둘에게 붙잡힌 나, 전경들한테서 나를 빼내려는

  삼형이 전경 둘에게 어깨를 잡힌 채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삼형은 같은 전경차에 실렸다.

  출입문 바로 앞 가석방 중인 삼형의 뒷자리에 앉은 나는

  고수부지와 내리막길에서 사람들이 끌려오는 모습을

  창으로 볼 수 있었다. 전경 둘이 사람들을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차가 움직였다.

  “전교조”, “, , 이 개새끼야. 주둥이 닥치지 못해?!”,

  “폭력”, “퍽퍽하는 충돌의 소리, 구타하는 소리,

  “우우전교조, 우우 전교조, …….”

  하는 사람들의 구호 소리가 이어져, 상황은 순식간에

  고조되었다. 우리가 폭력적인 전경의 기세를 제압했다.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

  이윽고 차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멈췄다.

  경찰서 안마당에는 몇 대의 전경차와 연행된 사람들이

  건물 입구부터 줄을 서고 있는 모습들로 채워져 있었다.

  “당신, 어디서 사는 누군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왔으니까 묻는 것 아니오?”

 

  새벽 3경 사람들은 다른 조그마한 실로 불려갔다.

  종이를 나누어주며 자술서를 써라, 이름만이라도 쓰라고

  요구해왔다. 쓸 수 없다로 대응을 했다.

  그리고 11시경 나와 김재일 선생이 경찰서를 나왔다.

  우리들은 서울에 추억을 남기자는 것에 의기투합했다.

  사실은 역으로 오기 직전 가락국수로 배를 채워서

  여비가 충분하지 못해서, 밤의 기차,

  심신의 피로를 풀고 싶은 제일 느린 기차를 선택하고서,

  밤, 어둠을 희미하게 제어하는 기차역의 가로등 빛이

  흐르는 시간 철로 옆길을 걸었다.

  일어난 일을 기찻길 옆을 거닐면서 주고받았다.

  전화를 걸러 갔던 김종대 선생이 뛰어와

  “오늘 아침에 전교생이 터미널에서 연행 교사 석방하라고

  연좌시위를 했다고 합디다.” 밝은 목소리를 털었다.

  “우리 애들이 싹수가 있어. 제 선생 생각할 줄도 알고.”

  “통이 아주 큰 애들이란께, 터미널까지 간 걸 보면.”

  김성진 선생이 말하자 강선 선생이 생각을 털어냈다.

  “전경한테 저지를 당했는디, 학교 운동장에서 데모를

  하고, 3학년들은 강당에 모여서 농성을 했다고 합디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데모를 안 한 해가 없는

  애들 아니오? 고놈들이나 된께 터미널까지 간 거제라.”

  김종훈 선생이 거들었고, 곧 열일곱이 기차에 올랐다.

  시위하는 더불어자고협의 재원, 다윗, 대호, 상일,

  광휘, 창석, ‘목고련성태, 승직을 기차에서 떠올렸다.

  2년 전 가톨릭회관 뒤편의 내 자취방에서

  봄에 만난 김종훈, 9월에 만난 윤보현, 김성진,

  가을에 만난 신재용, 그리고 지난가을에

  카페 세잔느에서 만난 안용주 선생을 기차에서 떠올렸다.

 

 

    * 큰형(박석률) ; 남민전 사건으로 1979년에 투옥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19881221일에 가석방됨.

    * 삼형(박석삼) ; 남민전 사건으로 1979년에 투옥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19881221일에 가석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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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3 오후 6:35 2020.05.04. 09:39 (세 시) <원작>

=(원작 교정: 3)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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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9-07-08 목포

    1989-07-09 서울 여의도 고수부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저지 및 합법성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 1712명 연행.

    1989-07-10 서울

.

.

. 시집과 관련한 해석

  「7·9 대회, 실제로 전교조를 결성하고 그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한 실제 교사들의 3일간의 투쟁과 그에 관련한 사정들을 묘사한 실존주의 앙가주망 경향의 시 형식의 글이다. 시간, 장소, 인명이 모두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리얼리즘 기법이 사용되었으며,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무비즘 수법이 사용되었다.

  2000년대에 촛불집회가 많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 그와 유사한 상황을 보게 된다. 토요일 밤 10시에. 불을 끈 미술실에 19명이 초에 불을 붙여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여기에 사용된 밝은 역사상징하는 표현이다.

  “19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움직임의 소리가 퍼져 흘렀다교사출정가를 부르면서 한 손에 촛불을 들고 한 손은 앞 사람의 어깨에 걸친 채 다시 원을 그리며 돌았다.에는 시각적 동적 심상을 지닌 동사의 사용을 중요한 기법으로 여기는 무비즘 경향이 잘 반영된 표현이다.

  가석방된 큰형삼형도 참가한 이 대회에서 전경들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와아!” 함성 후 구호를 외치며 중앙 부분에서부터 사람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원형으로 누운 사람의 손과 팔뚝에 참교육글자들이나 전교조 마크가 새겨진 천조각이 흔들거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러고는 공권력에 붙잡혀 연행되어 당신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왔으니까 묻는 것 아니오?”라는 소리를 듣게 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이 터미널에서 연좌시위를 한다. “기차에서 아이들을 떠올린다. 이 글에는 이렇게 매우 드문(한국 현대시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장면을 섬세하게 영화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미술실”, “고수부지”, “경찰서”, “터미널”, “철로 옆길등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여러 공간을 이동하면서 시간을 흘러가는 무비즘을 매우 간단하게 보게 한다.

.

.

. 전교조 결성 후의 역사와 관련한 7.9대회의 의의

  이 글은 나의 자서전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 박석준의 참교육, 학생들을 찾아서 15(1999)에 기록된, 실제 일어난 일들과 사정들을 시 형식으로 쓴 것이다.

  전교조는 1989528일에 결성되었다. 서울 경기 지역에 비해 (특히 서울에서 먼) 타도 지역에서는 전교조 투쟁에 어려움이 많았다. 목포라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우리 학교에서는 17명이 서울 7.9대회에 참가했다. 그 후 8월에 이곳에서 9인의 교사가 해직되었다.

  7·9 대회와 관련한 글 혹은 뉴스라든가 기사가 있었을 테지만 이 글처럼 자세히 다룬 것은 아직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이 대회에 다녀온 후 바로 철야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그날 1,712명이 연행되었고 8월에 1,500여 명 교사가 해직되는데, 7.9대회는 당시 교사의 해직 선택과 매우 관련이 있는 대회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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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세 시)

7·9대회

 

 

  78일 저녁 7, 전 조합원 32명이 학교로 돌아왔다.

  1층인 미술실에서 전 조합원 긴급회의가 진행된 후,

  합법성쟁취 범국민대회에 참가할 19명만 남았다.

  “지금부터 출정식 겸 전야제의 시간을 갖기로 하겠는데,

  우선 이 문건들루터 숙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성진 선생의 말에 사람들은 행동지침을 숙독해 갔.

  전원 연행 각오할 것, 상황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것,

  소속 신분을 밝히지 말 것 등을 외우고,

  출정식 및 전야제의 행사로 들어갔다. 토요일 밤 10시에.

  불을 끈 미술실에 19명이 초에 불을 붙여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19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움직임의 소리가 퍼져 흘렀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정열과 각오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교조여 영원하라!” 외침이 어둠을 뚫고 흘렀다.

  도는 것을 멈추고서 우리들은 결의문을 낭송했다.

  교사출정가를 부르면서 한 손에 촛불을 들고 한 손은

  앞 사람의 어깨에 걸친 채 다시 원을 그리며 돌았다.

 

  9, 아침에 목포에서 출발한 대절버스가 휴게소에 닿자,

  곧 나는 적힌 번호에서 숫자 하나씩을 빼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디냐?”

  “한강 고수부지.”, “알았다.”

  간단한 말로 삼형과 통화한 뒤, 쪽지를 버렸다.

  12시 무렵에, 대열을 이룬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강이 있는 곳으로 뻗은 내리막길로 막 들어섰는데

  “제야!” 소리가 다가와, 뜻밖에 큰형을 볼 수 있었다.

  “니 셋째형은 내려가다 만날 게다.

  나는 여기서 상황을 살필 테니까, 어서 내려가 봐.”

  고수부지 내리막길 끝에서 삼형이 나를 불렀다.

  “저쪽이다!” 삼형의 소리가 들리더니 마이크소리가 났다.

  나는 사람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윗길에 줄줄이 서 있는

  전경차와 내리막길로 오는 전경들을 확인했지만,

  뛰기 힘든 나의 가는 다리 때문에 나와 삼형은 걸어갔다.

  마이크를 중심으로 원을 이룬 채 마이크 소리에 따라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

  하고 구호를 외쳐댔다. 전경들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와아!” 함성 후 구호를 외치며 중앙 부분에서부터

  사람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원형으로 누운 사람의

  손과 팔뚝에 참교육글자들이나 전교조 마크가 새겨진

  천조각이 흔들거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아악!” 하는 바로 여자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나의 몸이 하늘에 떠 있었다.

  전경 둘에게 붙잡힌 나, 전경들한테서 나를 빼내려는

  삼형이 전경 둘에게 어깨를 잡힌 채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삼형은 같은 전경차에 실.

  출입문 바로 앞 가석방 중인 삼형의 뒷자리에 앉은 나는

  고수부지와 내리막길에서 사람들이 끌려오는 모습을

  창으로 볼 수 있었다. 전경 둘이 사람들을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차가 움직였다.

  “전교조” “, , 이 개새끼야. 주둥이 닥치지 못해?!”,

  “폭력”, “퍽퍽하는 충돌의 소리, 구타하는 소리,

  “우우ㅡ 전교조, 우우 전교조, …….”

  하는 사람들의 구호 소리가 이어져, 상황은 순식간에

  고조되었다. 우리가 폭력적인 전경의 기세를 제압했다.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

  이윽고 차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멈췄다.

  경찰서 안마당에는 몇 대의 전경차와 연행된 사람들이

  건물 입구부터 줄을 서고 있는 모습들로 채워져 있었다.

  “당신, 어디서 사는 누군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왔으니까 묻는 것 아니오?”

 

  새벽 경 사람들은 다른 조그마한 실로 불려갔다.

  종이를 나누어 주며 자술서를 써라, 이름만이라도 라고

  요구해 왔. 쓸 수 없다로 대응을 했다.

  그리고 11시경 나와 김재일 선생이 경찰서를 나왔다.

  우리들은 서울에 추억을 남기자는 것에 의기투합했다.

  사실은 역으로 오기 직전 가락국수로 배를 채워서

  여비가 충분하지 못해서, 밤의 기차,

  심신의 피로를 풀고 싶은 제일 느린 기차를 선택하고서,

  밤, 어둠을 희미하게 제어하는 기차역의 가로등 빛이

  흐르는 시간 철로 옆길을 걸었다.

  일어난 일을 기찻길 옆을 거닐면서 주고받았다.

  전화를 걸러 갔던 김종대 선생이 뛰어와

  “오늘 아침에 전교생이 터미널에서 연행교사 석방하라고

  연좌시위를 했다고 합디다.” 밝은 목소리를 털었다.

  “우리 애들이 싹수가 있어. 제 선생 생각할 줄도 알고.”

  “통이 아주 큰 애들이란께, 터미널까지 간 걸 보면.”

  김성진 선생이 말하자 강선 선생이 생각을 털어냈다.

  “전경한테 저지를 당했는디, 학교 운동장에서 데모를

  하고, 3학년들은 강당에 모여서 농성을 했다고 합디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데모를 안 한 해가 없는

  애들 아니오? 고놈들이나 된께 터미널까지 간 거제라.”

  김종훈 선생이 거들었고, 곧 열일곱이 기차에 올랐다.

  시위하는 더불어자고협의 재원, 다윗, 대호, 상일,

  광휘, 창석, ‘목고련성태, 승직을 기차에서 떠올렸다.

  2년 전 가톨릭회관 뒤편의 내 자취방에서

  봄에 만난 김종훈, 9월에 만난 윤보현, 김성진,

  가을에 만난 신재용, 그리고 지난가을에

  카페 세잔느에서 만난 안용주 선생을 기차에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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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3 오후 6:35 2020-03-25 오전 11:05 (전조합원//려졌/ /라고) (초고)

+ 2020.04.23. 14:28.. (/라고)

+ 2020.05.04. 09:39.. 11-추가-1-20200503.hwp (전 조합원/ 여자 소리) = <원작>

=(3) 2020.05.14. 18:01. 박석준시집_시간의색깔은자신이지향하는빛깔로간다_내지(0514).pdf (원작 교정)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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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0-03-23 2020-03-25

7·9대회

 

 

  78일 저녁 7, 전 조합원 32이 학교로 돌아왔다.

  1층인 미술실에서 전조합원 긴급회의가 진행된 후,

  합법성쟁취 범국민대회에 참가할 19만 남았다.

  “지금부터 출정식 겸 전야제의 시간을 갖기로 하겠는데,

  우선 이 문건들루터 숙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성진 선생의 말에 사람들은 행동지침을 숙독해 갔.

  전원 연행 각오할 것, 상황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것,

  소속 신분을 밝히지 말 것 등을 외우고,

  출정식 및 전야제의 행사로 들어갔다. 토요일 밤 10시에.

  불을 끈 미술실에 19이 초에 불을 붙여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19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움직임의 소리가 퍼져 흘렀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정열과 각오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교조여 영원하라!” 외침이 어둠을 뚫고 흘렀다.

  도는 것을 멈추고서 우리들은 결의문을 낭송했다.

  교사출정가를 부르면서 한 손에 촛불을 들고 한 손은

  앞 사람의 어깨에 걸친 채 다시 원을 그리며 돌았다.

 

  9, 아침에 목포에서 출발한 대절버스가 휴게소에 닿자,

  곧 나는 적힌 번호에서 숫자 하나씩을 빼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디냐?”

  “한강 고수부지.”, “알았다.”

  간단한 말로 삼형과 통화한 뒤, 쪽지를 버렸다.

  12 무렵에, 대열을 이룬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강이 있는 곳으로 뻗은 내리막길로 막 들어섰는데

  “제야!” 소리가 다가와, 뜻밖에 큰형을 볼 수 있었다.

  “니 셋째형은 내려가다 만날 게다.

  나는 여기서 상황을 살필 테니까, 어서 내려가 봐.”

  고수부지 내리막길 끝에서 삼형이 나를 불렀다.

  “저쪽이다!” 삼형의 소리가 들리더니 마이크소리가 났다.

  나는 사람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윗길에 줄줄이 서 있는

  전경차와 내리막길로 오는 전경들을 확인했지만,

  뛰기 힘든 나의 가는 다리 때문에 나와 삼형은 걸어갔다.

  마이크를 중심으로 원을 이룬 채 마이크 소리에 따라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

  하고 구호를 외쳐댔다. 전경들이 몇 겹으로 포위했다.

  “와아!” 함성 후 구호를 외치며 중앙 부분에서부터

  사람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원형으로 누운 사람의

  손과 팔뚝에 참교육글자들이나 전교조 마크가 새겨진

  천조각이 흔들거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아악!” 하는 바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나의 몸이 하늘에 떠 있었다.

  전경 둘에게 붙잡힌 나, 전경들한테서 나를 빼내려는

  삼형이 전경 둘에게 어깨를 잡힌 채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삼형은 같은 전경차에 실려졌.

  출입문 바로 앞 가석방 중인 삼형의 뒷자리에 앉은 나는

  고수부지와 내리막길에서 사람들이 끌려오는 모습을

  창으로 볼 수 있었다. 전경 둘이 사람들을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차가 움직였다.

  “전교조” “, , 이 개새끼야. 주둥이 닥치지 못해?!”,

  “폭력”, “퍽퍽하는 충돌의 소리, 구타하는 소리,

  “우우ㅡ 전교조, 우우 전교조, …….”

  하는 사람들의 구호 소리가 이어져, 상황은 순식간에

  고조되었다. 우리가 폭력적인 전경의 기세를 제압했다.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

  이윽고 차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멈췄다.

  경찰서 안마당에는 몇 대의 전경차와 연행된 사람들이

  건물 입구부터 줄을 서고 있는 모습들로 채워져 있었다.

  “당신, 어디서 사는 누군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왔으니까 묻는 것 아니오?”

 

  새벽 경 사람들은 다른 조그마한 실로 불려갔다.

  종이를 나누어 주며 자술서를 써라, 이름만이라도 라고

  요구해 왔. 쓸 수 없다로 대응을 했다.

  그리고 11시경 나와 김재일 선생이 경찰서를 나왔다.

  우리들은 서울에 추억을 남기자는 것에 의기투합했다.

  사실은 역으로 오기 직전 가락국수로 배를 채워서

  여비가 충분하지 못해서, 밤의 기차,

  심신의 피로를 풀고 싶은 제일 느린 기차를 선택하고서,

  밤, 어둠을 희미하게 제어하는 기차역의 가로등 빛이

  흐르는 시간 철로 옆길을 걸었다.

  일어난 일을 기찻길 옆을 거닐면서 주고받았다.

  전화를 걸러 갔던 김종대 선생이 뛰어와

  “오늘 아침에 전교생이 터미널에서 연행교사 석방하라고

  연좌시위를 했다고 합디다.” 밝은 목소리를 털었다.

  “우리 애들이 싹수가 있어. 제 선생 생각할 줄도 알고.”

  “통이 아주 큰 애들이란께, 터미널까지 간 걸 보면.”

  김성진 선생이 말하자 강선 선생이 생각을 털어냈다.

  “전경한테 저지를 당했는디, 학교 운동장에서 데모를

  하고, 3학년들은 강당에 모여서 농성을 했다고 합디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데모를 안 한 해가 없는

  애들 아니오? 고놈들이나 된께 터미널까지 간 거제라.”

  김종훈 선생이 거들었고, 곧 열일곱이 기차에 올랐다.

  시위하는 더불어자고협의 재원, 다윗, 대호, 상일,

  광휘, 창석, ‘목고련성태, 승직을 기차에서 떠올렸다.

  2년 전 가톨릭회관 뒤편의 내 자취방에서

  봄에 만난 김종훈, 9월에 만난 윤보현, 김성진,

  가을에 만난 신재용, 그리고 지난가을에

  까페 세잔느에서 만난 안용주 선생을 기차에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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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메모).

2020-03-23 오후 6:35 2020-03-25 오전 11:05 (초고)

= 2020.03.25. 15:35.. 박석준-3시집-0618-12-105()-5-20-2.hwp (초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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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경옥 시인_신재용_박석준_김성진_김종대_김재일(1989&nbsp;전교조 해직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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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섭 시인 _ 김성진 _ 김종대 _ 김재일 (1989&nbsp; 전교조 해직교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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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준_박재웅 시인_승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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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_ 박석준 (1989&nbsp; 전교조 해직교사들 )_1988-01-23_ 월출산 산장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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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_박석준(2023-06-31&nbsp;광주 창석 가게 앞)

    내가 해직되어 헤어진 후 33년 만에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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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 _ 창석 _ 신재용 선생 (198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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