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32 속보, 나의 길 ― 존재함을 위하여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24), 리얼리즘 (2), 나의 무비즘 (30)
1989-05-14 ⁓ 1989-06-19
박석준 /
<원작 최종교정본>
속보, 나의 길
― 존재함을 위하여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
5월 14일, 16명이 먼 곳에서 전남대까지 왔는데,
장학사와 교장과 교감이 정문 봉쇄로 길을 막았다.
나는 기어이 광주·전남 지역 노조 발기인대회장으로 갔다.
5월 28일, 아침 7시경 대절 버스가 목포에서 떠났다.
오후 1시에 전교조 결성대회가 개최될 한양대를 향해서.
결성대회를 원천 봉쇄할 거라는 뉴스를 들었기에,
더욱 한양대로 가야 한다는 심정이 절실해서.
일로에서 전경이 10시를 넘길 때까지 길을 막아
광주 진입로에서도 길을 막아 12시를 훨씬 넘겨버렸다.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가야 하는데, “만세! 결성됐어!” 소리가 났다.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뇌리에 ‘속보’라는 말을 새겨냈다.
6월 9일 김성진 등 전날 식당에 모였던 선생들은 모두
8시가 아직 안 된 이른 시각에 현관 앞에 도착했다.
결의를 굳히기 위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곧 윤보현 선생이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를 결성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점심시간이 되자 한 사람씩 조용히 4층 강당으로 갔다.
1시 20분경, 4층에서 교원노조가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흐르는 전주에 감흥이 일어나 나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왼쪽으로 가, 팔을 흔들며 솟구치는 희열에 젖어
“살아 숨 쉬는 교육 교육민주화 위해 가자, …….”
대중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선동하며 목소리를 쏟아냈다.
“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가 발전되기 바라는 바입니다만…….”이라고
아리송한 발언으로 우리들의 일에 끼어들어 왔는데……,
하루 뒤인 6월 10일에 전교조 전남지부가 결성되었다.
6월 17일 토요일, 학교 앞 삼거리에서 나왔을 때에,
1시 20분경에, 건너편 인도에 모여드는 선생들을,
그 20미터쯤 아래 전문대 쪽엔 차도의 전경을 보았다.
전문대가 목포지회 결성대회장인데.
밀고 밀리고, 어느 결엔지 내가 제1열에 서 있었다.
막기만 하던 전경이 교사들의 턱밑에 방패를 들이대고
뒤에서는 공권력을 무너뜨리려고 밀어붙이고,
견디다 못한 1열의 4인 스크럼이 풀어졌는데,
나는 방패에 오른쪽 손등을 찍혀버렸다.
피가 나고 등 뒤가 허전한데, 돌연 전경들이 내려갔다.
집회 예정 시간인 2시를 20분이나 지났는데.
교사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집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전문대 정문 앞에서 ‘더불어’와 ‘자고협’ 소속
낯익은 학생들의 “전교조 사수!” 하는 외침이 흘렀다.
6월 19일 월요일 오전 휴게실에 있는 나에게
“지회 결성 상황으로 미루어보니까 단위학교에도 탄압이
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
하고 가야 할 길을 김성진 선생이 물었다.
“일단 미술실로 거점을 잡읍시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김 선생에게 설명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1층 교장실 다음다음 교실에서
일이 진행된다고 선생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
2020-04-20 (넘었는데) <원작>
∽ 2020.05.14. 18:01 박석준시집_시간의색깔은자신이지향하는빛깔로간다_내지(0514).pdf <원작 단어 교체 ‘지났는데’ + 오교정 ‘단위 학교/발기인 대회장’
= 오교정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 2023-05-29 오후 4:30 (원작 최종교정: 발기인대회장/단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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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넘었는데)
속보, 나의 길
― 존재함을 위하여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
5월 14일, 16명이 먼 곳에서 전남대까지 왔는데,
장학사와 교장과 교감이 정문 봉쇄로 길을 막았다.
나는 기어이 광주·전남 지역 노조 발기인대회장으로 갔다.
5월 28일, 아침 7시경 대절 버스가 목포에서 떠났다.
오후 1시에 전교조 결성대회가 개최될 한양대를 향해서.
결성대회를 원천 봉쇄할 거라는 뉴스를 들었기에,
더욱 한양대로 가야 한다는 심정이 절실해서.
일로에서 전경이 10시를 넘길 때까지 길을 막아
광주 진입로에서도 길을 막아 12시를 훨씬 넘겨버렸다.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가야 하는데, “만세! 결성됐어!” 소리가 났다.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뇌리에 ‘속보’라는 말을 새겨냈다.
6월 9일 김성진 등 전날 식당에 모였던 선생들은 모두
8시가 아직 안 된 이른 시각에 현관 앞에 도착했다.
결의를 굳히기 위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곧 윤보현 선생이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를 결성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점심시간이 되자 한 사람씩 조용히 4층 강당으로 갔다.
1시 20분경, 4층에서 교원노조가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흐르는 전주에 감흥이 일어나 나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왼쪽으로 가, 팔을 흔들며 솟구치는 희열에 젖어
“살아 숨 쉬는 교육 교육민주화 위해 가자, …….”
대중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선동하며 목소리를 쏟아냈다.
“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가 발전되기 바라는 바입니다만…….”이라고
아리송한 발언으로 우리들의 일에 끼어들어 왔는데……,
하루 뒤인 6월 10일에 전교조 전남지부가 결성되었다.
6월 17일 토요일, 학교 앞 삼거리에서 나왔을 때에,
1시 20분경에, 건너편 인도에 모여드는 선생들을,
그 20미터쯤 아래 전문대 쪽엔 차도의 전경을 보았다.
전문대가 목포지회 결성대회장인데.
밀고 밀리고, 어느 결엔지 내가 제1열에 서 있었다.
막기만 하던 전경이 교사들의 턱밑에 방패를 들이대고
뒤에서는 공권력을 무너뜨리려고 밀어붙이고,
견디다 못한 1열의 4인 스크럼이 풀어졌는데,
나는 방패에 오른쪽 손등을 찍혀버렸다.
피가 나고 등뒤가 허전한데, 돌연 전경들이 내려갔다.
집회 예정 시간인 2시를 20분이나 지났는데.
교사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집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전문대 정문 앞에서 ‘더불어’와 ‘자고협’ 소속
낯익은 학생들의 “전교조 사수!” 하는 외침이 흘렀다.
6월 19일 월요일 오전 휴게실에 있는 나에게
“지회 결성 상황으로 미루어보니까 단위학교에도 탄압이
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
하고 가야 할 길을 김성진 선생이 물었다.
“일단 미술실로 거점을 잡읍시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김 선생에게 설명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1층 교장실 다음다음 교실에서
일이 진행된다고 선생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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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4 ∽ 2020.04.20. 15:49.받메. 2020년_04월(박석준)해설.hwp (넘었는데) <원작 원본>
↛ (오교정 + 단어 교체 ‘지났는데’)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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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9-05-14(일) 오후 2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전남 발기인대회 (전남대학교 체육관 앞)
1989-05-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결성식
(전남대학교 전국교직원노동조합결성식)
1989-06-09(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남지부 목포지회 영흥고 분회 결성식
1989-06-10(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남지부 결성식
1989-06-17(토) 오후 2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남지부 목포지회 결성식 (목포전문대학)
1989-06-19(월). 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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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객관적인 해석
「속보, 나의 길 ― 존재함을 위하여」는 제목이 ‘속보, 나의 길’이다. 국어사전에는 ‘속보’라는 글자로 된 단어가 5개다. 이 중에서 이 글에 사용된 ‘속보’는 다음의 3개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⓵속보(速步) : 빠르게 걷는 걸음. ⓶속보(續報) : 앞의 보도에 이어서 계속하여 보도함. ⓷속보(速報) ; 새로 들어온 사실을 빨리 알림.
“나는” 무엇보다도 전교조를 결성하는 길을 빠른 걸음으로 가고 싶다. 전교조 결성되었다는 소식에 전교조와 관련한 새로운 소식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 ―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먼저 ⓵로 해석할 필요가 있하다. 왜냐하면 제목에 ‘길’이라는 단어가 있으니까. 그리고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로 글이 시작하니까.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 이 말은 ‘가능성’이라는 관념이지만, 바로 “먼 곳에서 전남대까지 왔”고. “장학사와 교장과 교감이 정문 봉쇄로 길을 막았”음에도 “나는 기어이 광주·전남 지역 노조 발기인 대회장으로 갔다.”는 행동들을, 자유를 향한 주체의 선택과 현실 참여를 이어진다. 그리고 이 글은 부제가 ‘존재함을 위하여’이다. 이런 점들은 이 글은 실존주의 앙가주망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글은, 의미있는 해석적 환경에서 사건을 선별하고 연대의 순서를 따라 주요한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적은 기록 형식으로 쓴, 현실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표현하려는 태도(리얼리즘)를 반영하고 있다. ‘발기/결성’과 ‘막다/봉쇄’라는 행동들을 시 형식으로 구성한 이 글에는 전교조 결성 과정이 연대기 형태로 담겼고 전교조를 사수하려는 (고등)학생들의 운동이 곁들여졌다. 그리고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사람들의 관계와 움직임을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무비즘 기접이 사용되었다(→ 흘러나가기/흐르는/일어나/끼어들어). 이 글은 한국의 시에서는 보기 드문 내용을 새로운 형식으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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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작품 해설(남민전의 계승) 중 3 부분
위의 작품은 화자 자신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 과정에 참여한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1989년 “5월 14일, 16명”의 근무지 교사와 함께 “전남대까지 왔”다. 그 상황을 파악한 “장학사와 교장과 교감이 정문 봉쇄로 길을 막았”지만 화자는 “기어이 광주·전남지역 노조 발기인 대회장”에 참석했다. 화자가 이와 같이 행동한 것은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노신이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향」)라고 말한 것과 같은 신념을 가진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무수한 과제를 안고 전진하는 역사 속에서 우리의 함성이 드높이 울리는 그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것을 믿고 옥고를 치른 “큰형”의 길을 따랐다.
전교조 결성을 위한 화자의 행동은 1989년 “5월 28일, 아침 7시경 대절 버스가 목포에서 떠났다./오후 1시에 전교조 결성대회가 개최될 한양대를 향해서”의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지속되었다. 그날 “결성대회를 원천 봉쇄”하는 바람에 “한양대로 가”지는 못하고 대신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비록 서울의 개최지까지는 못 갔지만 “만세! 결성됐어!”라는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화자는 “뇌리에 ‘속보’라는 말을 새겨” 넣을 정도로 환희를 느꼈다.
그렇지만 전교조의 결성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89년 “6월 9일 김성진 등 전날 식당에 모였던 선생들은 모두/8시가 아직 안 된 이른 시각에 현관 앞에 도착했다./결의를 굳히기 위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곧 윤보현 선생이 교장실로 들어갔다./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를 결성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점심시간이 되자 한 사람씩 조용히 4층 강당으로 갔다./1시 20분경, 4층에서 교원노조가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흐르는 전주에 감흥이 일어나” 화자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다./왼쪽으로 가, 팔을 흔들며 솟구치는 희열에 젖어/“살아 숨 쉬는 교육 교육민주화 위해 가자, …….”/대중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선동하며 목소리를 쏟아냈다”. 화자를 비롯한 교사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교장은 ““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교직원노조/먼 곳 분회가 발전되기 바라는 바입니다만, …….”이라고/아리송한 발언으로 우리들의 일에 끼어들어 왔”지만, 화자를 비롯한 교사들은 굳건한 뜻을 지켜 “하루 뒤인 6월 10일에 전교조 전남지부”를 결성했다.
전교조의 설립은 지회나 단위학교로 내려갈수록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컸다. 그와 같은 모습은 1989년 “6월 17일 토요일, 학교 앞 삼거리에서 나왔을 때에,/1시 20분경에, 건너편 인도에 모여드는 선생들을,/그 20미터쯤 아래 전문대 쪽엔 차도의 전경을 보았다./전문대가 목포지회 결성대회장인데./밀고 밀리고, 어느 결엔지 내가 제1열에 서 있었다./막기만 하던 전경이 교사들의 턱밑에 방패를 들이대고/뒤에서는 공권력을 무너뜨리려고 밀어붙이고,/견디다 못한 1열의 4인 스크럼이 풀어졌는데,/나는 방패에 오른쪽 손등을 찍혀버렸다”와 같은 상황에서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피가 나고 등 뒤가 허전”했지만 집회장으로 간 것이다. 전교조 결성을 결의한 교사들도 “집회 예정 시간인 2시를 20분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흩어져서 집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전문대 정문 앞에서 ‘더불어’와 ‘자고협’ 소속/낯익은 학생들의 “전교조 사수!” 하는 외침”도 들려 더욱 힘이 났다.
1989년 “6월 19일 월요일 오전 휴게실에 있는 나에게/“지회 결성 상황으로 미루어보니까 단위학교에도 탄압이/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하고 가야 할 길을 김성진 선생이” 묻자 화자는 “일단 미술실로 거점을 잡읍시다.”라는 전략을 내놓았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김 선생에게 설명했다./“등잔 밑이 어둡다고 1층 교장실 다음다음 교실에서/일이 진행된다고 선생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명쾌하게 그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화자의 행동은 “지역 교협 창립대회장인 성당,/그 앞길에서 뛰어온 형사 십여 명이 나를 포위한/지난달 토요일 낮”이며 “12월 첫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된 후에, 2층 회의실에서/평교사회 창립대회를 진행하는 마이크 소리가 흘러”(「먼 곳 4 ― 수감된 거리에 서면」)나왔다고 밝힌 데서 보듯이 이전의 경험이 축적되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화자는 1987년 10월 17일 목포교협 창립과 1987년 12월 4일 영흥고 평교사회 창립 등에 관여했다. 또한 참교육 실천을 위한 학생들의 조직인 “더불어”나 “자고협”(조직 자주 교육 쟁취 고등학생 협의회)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작품의 화자는 전교조 과정을 몸소 겪었다. 1989년 7월 9일 교사들은 전교조의 합법성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는데, 화자는 열아홉 명의 교사와 전야제를 갖고 “전원 연행 각오할 것, 상황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할 것/소속 신분을 밝히지 말 것” 등을 각오하고 참가했다. “9일, 아침에 목포에서 출발한 대절버스가” “한강 고수부지”에 도착해 “대동단결, 대동투쟁, 전교조 합법성 쟁취하자!”(「7·9대회」)라고 구호를 외치자 전경들이 몇 겹으로 포위해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까지 받은 것이다.
화자는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뒤 학교로 돌아와 전교조 교사들과 함께 7월 11일부터 무기한 단식 수업과 철야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8월 4일 8시 반경에 교장이 농성장 안으로 들어”와 ““탈퇴 문제를 신중히 고려해 봄이 좋을 것 같은데./소낙비는 피해 가는 것처럼”이라고 회유하자 “분열시키려는 의도라고 판단하여” 반발했다. 그 일이 있은 지 “열흘 후 나와 강, 4김, 신, 안, 윤, 9인이/먼 곳에서 직권면직 되었다”(「단식 수업 그리고 철야농성」).
1980년대에 들어 과도한 입시교육, 학교 조직의 관료화, 정치 활동 통제 등에 문제 제기를 하는 교사들이 소모임을 만들고 교육자협회 등의 사회단체들과 연대 활동을 한 결과 1986년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했고, 1987년 9월 27일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을 창립했다. 그렇지만 전교협은 공식적인 교사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어 1989년 5월 28일 전교조를 결성했다. 전교조는 교육 환경 및 제도 개선, 교육 민주화와 자주성 확립, 교사의 노동3권 보장, 참교육 실천 등의 활동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간주하고 1,500명 이상의 관련 교사를 구속하거나 파면하거나 해임했다.
직권면직을 당한 작품의 화자는 실직자로서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십 미터 간격의 책상에 ‘500원’이라고 쓴 종이를 붙이고/끈이 달린 참교육 세라믹 볼펜 5백 개가 담긴 박스를/열어놓았다. 2인 1조로 길가에서 장사를 시작”(「볼펜을 팔면서」)하며 버티어 나갔다. 화자는 그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전교조 합법화와 민주 대개혁을 위한 전국교사대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7개월째 말이 단절되고 일로부터 소외되”고, “심장에 이상이 생겨 다리와 발등이 붓는다고 진단”을 받고, “불우이웃이 되어 받은 쌀로 연명”했지만, “오늘 참가하지 않으면 나는 잊혀진 사람이 될 것”(「장밋빛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1992년 11월 8일 서울대에서 열린 행사 등에 참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 끝에 1999년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전교조는 합법화되었다.
화자가 전교조의 합법화에 온몸으로 참여한 것은 시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음악이 끊기면서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삽입됐다./광주로 돌아온 날, 4월부터 나를 감시하고 시험도 방해한/형사가, 광주와 서울 각 5명인 형사가 보이지 않았다./11월엔 해방전선, 큰형, 삼형, 검거 기사를 보았다”와 같은 상황에서 “1년간 학사경고를 받은 나는 문리대 벤치에서 쇼윈도/세상을 생각하거나 하다가 4월부터 데모대에 끼어들었다./5월 15일 오후 4시엔 도청 앞 집회에” 참석한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우리집 쪽으로 총검을 지닌 계엄군들이 가는 것을 보고/불안하게 걷는 나. 우리집 대문 앞 술집으로 들어가기에,/숨죽여 어떻게 열렸는지 모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나.”(「1980년」)라고 밝혔듯이 아픈 몸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목숨 걸고 맞설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항쟁의 역사에 헌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 부채감을 갚기 위해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두 형의 길을 따라 전교조의 합법화 투쟁에 나선 것이다.
* 박석률,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 풀빛, 1989, 225쪽.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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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0-03-24 ∼ 2020-03-25 (차도에/넘었는데)
속보, 나의 길 ― 존재함을 위하여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
5월 14일, 16명이 먼 곳에서 전남대까지 왔는데,
장학사와 교장과 교감이 정문봉쇄로 길을 막았다.
나는 기어이 광주·전남지역 노조 발기인대회장으로 갔다.
5월 28일, 아침 7시경 대절 버스가 목포에서 떠났다.
오후 1시에 전교조 결성대회가 개최될 한양대를 향해서.
결성대회를 원천봉쇄할 거라는 뉴스를 들었기에,
더욱 한양대로 가야 한다는 심정이 절실해서.
일로에서 전경이 10시를 넘길 때까지 길을 막아
광주 진입로에서도 길을 막아 12시를 훨씬 넘겨 버렸다.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가야 하는데, “만세! 결성됐어!” 소리가 났다.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뇌리에 ‘속보’라는 말을 새겨냈다.
6월 9일 김성진 등 전날 식당에 모였던 선생들은 모두
8시가 아직 안 된 이른 시각에 현관 앞에 도착했다.
결의를 굳히기 위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곧 윤보현 선생이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직원노조 먼 곳분회를 결성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점심시간이 되자 한 사람씩 조용히 4층 강당으로 갔다.
1시 20분경, 4층에서 교원노조가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흐르는 전주에 감흥이 일어나 나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왼쪽으로 가, 팔을 흔들며 솟구치는 희열에 젖어
“살아 숨쉬는 교육 교육민주화 위해 가자, …….”
대중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선동하며 목소리를 쏟아냈다.
“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가 발전되기 바라는 바입니다만, …….”이라고
아리송한 발언으로 우리들의 일에 끼어들어 왔는데……,
하루 뒤인 6월 10일에 전교조 전남지부가 결성되었다.
6월 17일 토요일, 학교 앞 3거리에서 나왔을 때에,
1시 20분경에, 건너편 인도에 모여드는 선생들을,
그 20미터쯤 아래 전문대 쪽엔 차도에 전경을 보았다.
전문대가 목포지회 결성대회장인데.
밀고 밀리고, 어느결엔지 내가 제1열에 서 있었다.
막기만 하던 전경이 교사들의 턱밑에 방패를 들이대고
뒤에서는 공권력을 무너뜨리려고 밀어붙이고,
견디다 못한 1열의 4인 스크럼이 풀어졌는데,
나는 방패에 오른쪽 손등을 찍혀 버렸다.
피가 나고 등뒤가 허전한데, 돌연 전경들이 내려갔다.
집회 예정 시간인 2시를 20분이나 넘었는데.
교사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집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전문대 정문 앞에서 ‘더불어’와 ‘자고협’ 소속
낯익은 학생들의 “전교조 사수!” 하는 외침이 흘렀다.
6월 19일 월요일 오전 휴게실에 있는 나에게
“지회 결성 상황으로 미루어보니까 단위학교에도 탄압이
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
하고 가야 할 길을 김성진 선생이 물었다.
“일단 미술실로 거점을 잡읍시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김 선생에게 설명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1층 교장실 다음다음 교실에서
일이 진행된다고 선생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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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6.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 (메모).
2020-03-24 오후 3:05 ∼ 2020-03-25 오전 9:59 (차도에/넘었는데) (초고)
= 2020.03.25. 15:35.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5-20-2.hwp (초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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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성진_나_홍정수(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_출간기념회)_광주시 황대포 빈대떡_2020-06-12_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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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5-14_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전남 발기인대회 홍보물(오창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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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5-28_전남대학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식_(꼴찌선생들의출발선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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