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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나의 무비즘 (12), 실존주의 앙가주망 (8) 1980년 / 박석준

나의 12 1980

나의 무비즘 (12), 실존주의 앙가주망 (8)

1979 / 1980

박석준 /

(원작 최종 교정)

1980

 

 

  “선생님께서도 5·18 때 광주에 계셨던데, 정말

  해방구란 곳이 있었어요?” 제자의 선배가 물었다.

 

  아침에 한봉* 형이 사다 준 흰 고무신만 마루에 있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6일 후 막내랑 서울로 갔다.

  10시경, 어머니, 작은형이 아버지 사는 방에 돌아왔다.

  전기가 흐른가 몇 번 정신 잃었제라. 그런디 뭔 꿍꿍이가

  있는가 여덟 반이나 돼서 가라고 내보냅디다.

  나는 트랜지스터로 음악을 들으며 새벽으로 갔다. 그냥

  음악이 끊기면서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삽입됐다.

  광주로 돌아온 날, 4월부터 나를 감시하고 시험도 방해한

  형사가, 광주와 서울 각 5인 형사가 보이지 않았다.

  11월엔 해방전선*, 큰형, 삼형, 검거 기사를 보았다.

  1년간 학사경고를 받은 나는 문리대 벤치에서 쇼윈도

  세상을 생각하거나 하다가 4월부터 데모대에 끼어들었다.

  515일 오후 4시엔 도청 앞 집회에 갔다.

  시내에 난리 났어. 18일 낮 열한 에 나를 데리러

  운암동에 온 막내의 말에 귀가했으나 심란하다.

  195시 신탁의 집에서 함께 나와 우리 집으로 가다가,

  좀 전에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학생이 총에 맞았어요,

  전하는 소리. 파출소 앞에서 헤어졌다. 계림동 오거리

  우리 집 쪽으로 총검을 지닌 계엄군들이 가는 것을 보고

  불안하게 걷는 나. 우리 집 대문 앞 술집으로 들어가기에,

  숨죽여 어떻게 열렸는지 모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나.

  신탁과 재단사 인학은 MBC 방송국 쪽으로 달려갔지만,

  호흡이 곤란해진 나는 타오르는 불길을 집에서 보았다.

  21일 낮 1시경 수많은 시위대 속 나는 관광호텔 앞에서

  내 옆으로 날아오는 총소리, 총알에 놀라 움직여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에 나도 움직였다. 하지만 열 발을 뛰기

  힘들어 걸어가는 나, 쓰러지는 여자와 벗겨진 신발,

  쓰러지는 사람, 구하러 가는 사람, 건물 앞이나 골목

  어귀에 멈춰 선 사람, 금남로를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

  동구청 앞 트럭에 밥을 올려주는 아줌마들을, 트럭 위

  동생들과 사람들을, 민주를 지키러 가는 광주를 보았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화목한 날들을 보았다.

  동네 양장점 학생이 죽었다고 한다. 상무관이 어디냐?

  상무관 많은 관 앞의 통곡. 관 속의 태극기.

  금남로 한국은행 앞 빨간 핏물을 어머니와 함께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

 

  수술한 나를 찾아 병원에 온, 시민군 상원* 형도 전사했다.

  그러나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는 너는 그 10일간

  광주에 확실히 없었다. 사진 속 사람이 어떠니 하는 너는

  그 기간 광주의 사진들 속에도 없다.

  금남로. 내가 손대기 전 손대지 마라,

  하는 오늘 금남로. !

 

 

  * 윤한봉(19472007): 사회운동가. 5.18 마지막 수배자.

  * 해방전선: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 윤상원(19501980) 열사: 노동운동가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서 활약. 들불야학 박기순(19581978)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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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 2020-02-22 <원작 원고 원본>

(대화와 상념 속 어휘를 오교정: 8/다섯 /11)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2023-05-31 오후 11:36 <원작 최종교정본> (여덟 /5/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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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2 <원작 원고>

팔십년(80)

 

 

  “선생님께서도 5·18 때 광주에 계셨던데, 정말

  해방구란 곳이 있었어요?” 제자의 선배가 물었다.

 

  아침에 한봉형이 사다준 흰 고무신만 마루에 있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6일 후 막내랑 서울로 갔다.

  , 어머니, 작은형이 아버지 사는 방에 돌아왔다.

  전기가 흐른가 몇 번 정신 잃었제라. 그런디 뭔 꿍꿍이가

  있는가 여덟 반이나 돼서 가라고 내보냅디다.

  나는 트랜지스터로 음악을 들으며 새벽으로 갔다. 그냥

  음악이 끊기면서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삽입됐다.

  광주로 돌아온 날, 4월부터 나를 감시하고 시험도 방해한

  형사가, 광주와 서울 각 5인 형사가 보이지 않았다.

  11월엔 해방전선, 큰형, 삼형, 검거 기사를 보았다.

  1년간 학사경고를 받은 나는 문리대 벤치에서 쇼윈도

  세상을 생각하거나 하다가 4월부터 데모대에 끼어들었다.

  515일 오후 4시엔 도청 앞 집회에 갔다.

  시내에 난리 났어. 18일 낮 열한에 나를 데리러

  운암동에 온 막내의 말에 귀가했으나 심란하다.

  195시 신탁의 집에서 함께 나와 우리집으로 가다가,

  좀 전에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학생이 총에 맞았어요,

  전하는 소리. 파출소 앞에서 헤어졌다. 계림동오거리

  우리집 쪽으로 총검을 지닌 계엄군들이 가는 것을 보고

  불안하게 걷는 나. 리집 대문 앞 술집으로 들어가기에,

  숨죽여 어떻게 열렸는지 모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나.

  신탁과 재단사 인학은 MBC송국 쪽으로 달려갔지만,

  호흡이 곤란해진 나는 타오르는 불길을 집에서 보았다.

  21일 낮 1시경 수많은 시위대 속 나는 관광호텔 앞에서

  내 옆으로 날아오는 총소리, 총알에 놀라 움직여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에 나도 움직였다. 하지만 열 발을 뛰기

  힘들어 걸어가는 나, 쓰러지는 여자와 벗겨진 신발,

  쓰러지는 사람, 구하러 가는 사람, 건물 앞이나 골목

  어귀에 멈춰 선 사람, 금남로를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

  동구청 앞 트럭에 밥을 올려주는 아줌마들을, 트럭

  동생들과 사람들을, 민주를 지키러 가는 광주를 보았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화목한 날들을 보았다.

  동네 양장점 학생이 죽었다고 한다. 상무관이 어디냐?

  상무관 많은 관 앞의 통곡. 관 속의 태극기.

  금남로 한국은행 앞 빨간 핏물을 어머니와 함께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

 

  수술한 나를 찾아 병원에 온, 시민군 상원형도 전사했다.

  그러나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는 너는 그

  광주에 확실히 없었다. 사진 속 사람이 어떠니 하는 너는

  그 기간 광주의 사진들 속에도 없다.

  금남로. 내가 손대기 전 손대지 마라,

  하는 오늘 금남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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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 2020-02-22 <원작 원고 원본>

(원작 원고 팔십년(80)에는 각주 없음.)

(2020.04.13.에 각주 달고, 2020.04.23.에 제목을 ‘1980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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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

    1986.12.13. (광주 유동 슬픈 방근처 술집)

    대학에 진학한 먼 곳제자와 제자의 대학 선배를 만남

  2

    1979.10.26. 오후 8시경, 박정희 대통령 서거 (서울)

    1979.10.26. , (중앙정보부에게 연행된) 어머니와 작은형이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고 풀려남, (서울)

    11.03. 대통령 국장 날, 남민전 사건으로 형들 체포됨 (서울)

    19805191630: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최초 실탄사격. (광주)

    198051202150: MBC 방송국을 방화. (광주)

  3

    2019.05. 5.18 북한개입설 (현재 시점, 광주 금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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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만을 본 해석

  「1980보았다.’3회 반복하고,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2회 반복하여 내용상 운울을 이룬다.

  이 글은 선배의 물음에 대답하고 이어 생각을 떠올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선배와 만난 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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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과 관련한 해석

  「1980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한 리얼리즘 글이며, 무비즘 기법이 사용된 글이다. 언뜻 보면 당일에 묻고 대답하고 생각을 떠올린 것을 표현한 글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날을 현재 시점(이중적 현재 시점)으로 하여 표현한 글이다.

  1연이 첫 번째 현재 시점(1986.12.13.)에서 한 질문이고 2연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요약하여 표현한 것이다. 3연은 20195월 어느 날의 생각을 두 번째 현재 시점으로 하여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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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밖 실화

  197612월 말에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희귀 심장병(TOF) 수술에 성공하여 신문에 난 나를 격려하려고 큰형 박석률과 함께 그의 후배인 윤상원 형이 19771월에 입원실로 찾아왔다.

 

  큰형은 197812월에 대학교에 진학하라며 나에게 계림동 성당이 솟은 언덕 밑 포장마차에서 20만 원을 주고 헤어졌다.

19794월에 형사들이 계림동 삼거리의 안집으로 들이닥쳐 수색했다.(→ 「장미 곁의 두 얼굴) 서울과 광주에서 온 이 10명의 형사는 집을 감시했다. 남민전 조직원인 큰형, 삼형을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전남대학교 문리대 1학년생인 나는 삼거리 집 앞에서 오후 4시경에 경찰서로 연행되어 취조와 구타를 당하고 12시 무렵에 풀려났다. 그 후 한 형사가 형들을 찾아내려고 오후엔 나를 데리고 다녔고, 다른 한 형사는 학교에서도 나를 감시하고 시험도 못 보게 하려고 방해했다. 나는 돈이 없어서 교재 한 권 없이 학교에 다녔지만 사람들을 피하려고 수업은 거의 듣지 않은 채 문리대 앞 벤치에 앉아 (쇼윈도 세상에 대해) 사색하곤 했다. 4월 어느 날엔 내가 학교에 갔다 돌아오니 동생들(헌과 수)이 형사들한테 구타당하고 있었다. 옆방 사람에게 걸려온 삼형의 전화를 헌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한 켤레

  우리 엄마 못 봤어요?

  검은 세단차가 낮에 집 앞에 대더니 실어가던데……?

  뭔 일 있냐고 만화가게 아저씨가 물어보고

  중정부에 끌려간 엄마 찾으러 서울로 동생이랑 올라가고.

박석준, 부분

 

  어머니 신으라고 윤한봉 형이 19791020일 아침에 놓고 간 흰 고무신이 내가 대학교에서 돌아온 오후에도 안채의 공부방 옆 마루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집 앞 만화가게(오복당) 아저씨에게서 상황을 알게 되어, 1026일에 동생 수가 서울 갈 차비를 빌려왔다. 함께 고속버스를 탔는데, 휴게소에 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서울 아버지가 세들어 사는 집을 어렵게 찾아내어 대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형사들이 들이닥치면서 석률이, 석삼이 맞지?”라고 다그쳤다. 어머니와 작은형은 무슨 이유로 풀려났는지도 몰랐다. 내가 트랜지스터로 음악을 듣다가 알게 된 대통령 서거 소식을 알렸을 때까지는.

  19805월에 재판을 받고 큰형은 무기형, 삼형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419일 무렵부터 데모대에 끼여 도청 앞으로 갔다. 서점 주인을 잡아갔다고 소식을 어머니가 전했다. 517일 저녁엔 운암동 아파트에서 사는 후배를 만나러 갔는데 그 집에서 김대중 내란음모 뉴스를 듣고 잤다. 다음날인 518일에도 금남로로 갔다.

  1980519일엔 5시경에 계림파출소 근처(옛 우리 식료품 가게 근처)에서 학생이 총에 맞았다는 말을 어떤 여자한테 들었다. 계엄군들이 계림동 성당으로 뻗은 삼거리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삼거리의 양장점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꺾더니 만화가게 옆 술집(우리집 대문 건너편)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는 숨을 죽여 걸었다.

  항쟁의 날이 이어졌다. 사상자 소식이 들려왔고 나에게 5.18에 적극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 날마다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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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남대학교 문리대 앞 벤치&nbsp; 1980_ 봄

  전남대학교 문리대 앞 벤치 1980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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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앞 분수대와 전일빌딩 주변 -1 1980_05

  전일빌딩 주변-1 1980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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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 _ 계엄군 _ 진압 _1980_05

  금남로_계엄군_진압_1980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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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앞 _1980_05

  전남대 앞_1980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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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 _ 중앙교회 위 헬기 _1980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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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middot;18 당시 전일빌딩 (하이콤 건물 쪽 관광호텔 앞에 내가 서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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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7_19:14 5.18&nbsp; 전야제 광주

  2023-05-17_19:14 5.18 전야제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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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오교정) 시집

1980

 

 

  “선생님께서도 5·18 때 광주에 계셨던데, 정말

  해방구란 곳이 있었어요?” 제자의 선배가 물었다.

 

  아침에 한봉* 형이 사다 준 흰 고무신만 마루에 있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6일 후 막내랑 서울로 갔다.

  10시경, 어머니, 작은형이 아버지 사는 방에 돌아왔다.

  전기가 흐른가 몇 번 정신 잃었제라. 그런디 뭔 꿍꿍이가

  있는가 8 반이나 돼서 가라고 내보냅디다.

  나는 트랜지스터로 음악을 들으며 새벽으로 갔다. 그냥

  음악이 끊기면서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삽입됐다.

  광주로 돌아온 날, 4월부터 나를 감시하고 시험도 방해한

  형사가, 광주와 서울 각 다섯인 형사가 보이지 않았다.

  11월엔 해방전선*, 큰형, 삼형, 검거 기사를 보았다.

  1년간 학사경고를 받은 나는 문리대 벤치에서 쇼윈도

  세상을 생각하거나 하다가 4월부터 데모대에 끼어들었다.

  5 15일 오후 4시엔 도청 앞 집회에 갔다.

  시내에 난리 났어. 18일 낮 11에 나를 데리러

  운암동에 온 막내의 말에 귀가했으나 심란하다.

  19 5시 신탁의 집에서 함께 나와 우리 집으로 가다가,

  좀 전에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학생이 총에 맞았어요,

  전하는 소리. 파출소 앞에서 헤어졌다. 계림동 오거리

  우리 집 쪽으로 총검을 지닌 계엄군들이 가는 것을 보고

  불안하게 걷는 나. 우리 집 대문 앞 술집으로 들어가기에,

  숨죽여 어떻게 열렸는지 모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나.

  신탁과 재단사 인학은 MBC 방송국 쪽으로 달려갔지만,

  호흡이 곤란해진 나는 타오르는 불길을 집에서 보았다.

  21일 낮 1시경 수많은 시위대 속 나는 관광호텔 앞에서

  내 옆으로 날아오는 총소리, 총알에 놀라 움직여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에 나도 움직였다. 하지만 열 발을 뛰기

  힘들어 걸어가는 나, 쓰러지는 여자와 벗겨진 신발, 

  쓰러지는 사람, 구하러 가는 사람, 건물 앞이나 골목

  어귀에 멈춰 선 사람, 금남로를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

  동구청 앞 트럭에 밥을 올려주는 아줌마들을, 트럭 위

  동생들과 사람들을, 민주를 지키러 가는 광주를 보았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화목한 날들을 보았다.

  동네 양장점 학생이 죽었다고 한다. 상무관이 어디냐?

  상무관 많은 관 앞의 통곡. 관 속의 태극기.

  금남로 한국은행 앞 빨간 핏물을 어머니와 함께 보았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밤에 돌아와 후회하는.

 

  수술한 나를 찾아 병원에 온, 시민군 상원* 형도 전사했다.

  그러나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는 너는 그 10일간

  광주에 확실히 없었다. 사진 속 사람이 어떠니 하는 너는

  그 기간 광주의 사진들 속에도 없다.

  금남로. 내가 손대기 전 손대지 마라,

  하는 오늘 금남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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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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