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44 침묵 수업
나의 리얼리즘 (8), 나의 무비즘 (43)
1996-04
박석준 /
침묵 수업
선생님의 가벼운 몸을 안쓰러워하거나 생각을 물어올 정도로 애들이 가까이해주는 시간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선생님, 설명은 필요 없어요. 그냥 답만 적으면 돼요.”,
아이들이 요구했다, 중2 교실의 칠판에 적어놓은 언어
영역 문제들에 대한 선생의 설명을 거부했다.
무엇 때문에 학교에 온 거지? 애들이나 나나. 생각했다.
“설명은 필요 없다고?”라고, 96년 4월에 물었다.
“예, 설명하지 마세요. 나중에 자습서 보면 되니까요.”
“그러면 나는 칠판에 문제만 적어주면 된다 이거죠?”
“예, 그냥 문제하고 답만 적어놓으세요.”
“알았어요. 정 원한다면 앞으로 나는 적기만 할 테니까,
자습서를 보든 뭣을 하든 알아서 하세요.”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흘러 그 수업이 끝나고 말았을 뿐.
다음 날엔 그 교실에서 인사도 주고받음이 없이 나는
칠판에 적기만 했다. 선생이 교실에 들어오고 20분쯤
흐른 동안 주위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말소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애들도 적기는 했을 테지만.
그 다음 날에는 선생과 애들이 적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했을 뿐 교실 사람들 사이엔 아무런 말이 오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 4일이 더 지나갔다.
애들은 어떻게 해달라거나 어떻게 하고 싶다는
말은커녕 다른 어떤 말도 꺼냄이 없이 국어 시간에
문제와 답만을 적어놓고선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8일째 되는 날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자습서들 보고 있는 거죠?”라고. 애들은
“아뇨, 처음엔 보려고 했지만 재미가 없어요.”
“잘못했어요. 선생님 말씀 잘 들을게요. 설명해주세요.”
“선생님이 말을 안 하시니까 무서워요.”
와 같이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8일 만에 선생으로서의 설명의 말을 해가게 되었다.
내가 만일 당면한 상황에 대한 애들의 인식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한다면,
대개의 애들은 선생(의 말)이 무서워서 그대로 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분명히 자기 나름의 판단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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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4 오후 6:13 (거부하는 행위였다.) (초고)
∼ 2020.04.13. 11:58.메. 2020년_04월(박석준)원고-교정본.hwp (거부했다.) <원작 원본>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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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96.4. 37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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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객관적 해석
「침묵 수업」은 한 공간에서 8개의 날이 흐르면서 ‘말’과 관련한 학생(애들)과 선생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 관계에서 행동이 ‘(선생의 설명을 거부했다/주고받는 말소리는 점차 사라져갔다/아무런 말이 오감이 없었다/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잘못했어요 … 설명해주세요)’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행동들이 ‘말’을 해야 하는 ‘언어 영역’과 관련해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풍자적인 느낌을 준다.
선생과 학생의 의식이 객관 현실의 전체상을 향해 운동해감으로써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리얼리즘을 반영하고 있다. 이 글은 한 장소에서 행동들이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는 양태(장면들)를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보여주는 무비즘 기법이 사용되었다.
“말”이 중심소재인 이 글에서 ‘위치는 말의 힘과 관련된다(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말의 힘을 실현하기 쉽다, 말로 통제한다.)’는 것과, ‘살아가는 양태(어떤 사람의 삶의 이미지)가 말의 힘을 실현하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다. 이 글은 ‘눈앞에 있는 보이는 존재가 말이 없을 때 나에게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굴에는 “대개의 애들은 선생(의 말)이 무서워서 그대로 하려고 할 것이다.”에 위치의 힘으로 길들여서 통제(명령)하려는 자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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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이 글과 관련한 1996년의 나
이 글은 나의 삶에서 1996년(39살 때) 4월에 실제로 벌어진 사건들과 나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39살인 나는 ‘말’을 해야만 하는 국어 과목 선생이지만 우울할 때도 있어서 내 청춘을 매우 굴곡 깊고 매우 아름답게 구성해가고 싶었다.
새로 만난 아이들은 ‘선생님은 소년 같아요.’(나는 39살이나 먹었는데) 하거나, ‘선생님은 너무 가벼워요, 밥 많이 드세요.’ 하거나 팔씨름을 하자고 졸라서 승리하거나 선생님을 높이 들어올려보거나 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 글에 나오는 4월 어느 날에 선생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 거부했다. 그날 저녁 고심을 하다가 생각해냈다. ‘아이들이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도록 하자. 장난을 걸어와도 내가 아무런 말을 안 하면 나를 무서워하겠지.’라는 묘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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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시인의 「전문가」
전문가(專門家) /기형도
이사 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판단)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묘사)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설명)
그러나 예들아, 상관없다
유리야 또 갈아 끼우면 되지
마음껏 골목에서 놀렴 (말)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묘사)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말)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설명)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설명)
어느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설명/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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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에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Grotesque Realism) 경향이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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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0-03-24 (거부하는 행위였다.)
침묵 수업
선생님의 가벼운 몸을 안쓰러워하거나 생각을 물어 올 정도로 애들이 가까이 해주는 시간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선생님, 설명은 필요 없어요. 그냥 답만 적으면 돼요.”,
아이들이 요구했다, 중2 교실의 칠판에 적어 놓은 언어
영역 문제들에 대한 선생의 설명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무엇 때문에 학교에 온 거지? 애들이나 나나. 생각했다.
“설명은 필요 없다고?”
“예, 설명하지 마세요. 나중에 자습서 보면 되니까요.”
“그러면 나는 칠판에 문제만 적어 주면 된다 이거죠?”
“예, 그냥 문제하고 답만 적어 놓으세요.”
“알았어요. 정 원한다면 앞으로 나는 적기만 할 테니까,
자습서를 보든 뭣을 하든 알아서 하세요.”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흘러 그 수업이 끝나고 말았을 뿐.
다음 날엔 그 교실에서 인사도 주고받음이 없이 나는
칠판에 적기만 했다. 선생이 교실에 들어오고 20분쯤
흐른 동안 주위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말소리는
점차 사라져 갔다. 애들도 적기는 했을 테지만.
그 다음 날에는 선생과 애들이 적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했을 뿐 교실 사람들 사이엔 아무런 말이 오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 4일이 더 지나갔다.
애들은 어떻게 해 달라거나 어떻게 하고 싶다는
말은커녕 다른 어떤 말도 꺼냄이 없이 국어 시간에
문제와 답만을 적어 놓고선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8일째 되는 날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자습서들 보고 있는 거죠?”라고. 애들은
“아뇨, 처음엔 보려고 했지만 재미가 없어요.”
“잘못했어요. 선생님 말씀 잘 들을게요. 설명해 주세요.”
“선생님이 말을 안 하시니까 무서워요.”
와 같이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8일 만에 선생으로서의 설명의 말을 해 가게 되었다.
내가 만일 당면한 상황에 대한 애들의 인식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한다면,
대개의 애들은 선생(의 말)이 무서워서 그대로 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분명히 자기 나름의 판단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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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4 오후 6:13 (초고)
= 2020.03.24. 18:49.내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5-93-1.hwp (초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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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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