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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4), 나의 무비즘 (6) 볼펜을 팔면서 / 박석준

나의 6 볼펜을 팔면서

나의 무비즘 (6), 실존주의 앙가주망 (4)

1975 / 1989-09-11

박석준 /

볼펜을 팔면서

 

 

  10미터 간격의 책상에 500이라고 쓴 종이를 붙이고

  끈이 달린 참교육 세라믹 볼펜 500개가 담긴 박스를

  열어놓았다. 2 1조로 길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전교조* 참교육 펜 사세요. 오백 원입니다.”

  사람을 부르는 9월의 소리를 내는데.

  하지만 옆엣사람 해직 여교사는……. 아무 소리가 없어도

  찾아와 주는,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데, 박스만을 챙겨 두 조가 한꺼번에 이동하는 모습.

  삼십 분만 하려면 왜? 상의 없이, 무슨 생각으로?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고 올게요.”

  옆엣사람이 불쑥 말했다, 30분쯤 더 지난 2시에.

  4시 조금 넘어, 달려왔다. 유치원생이나 될 남자아이가

  책상에 올려놓는다. , 은전 네 개와 동전 다섯 개를,

  “아저씨, 이것 갖고 싶은데, 이 사백오십 원밖에 없어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털어 보인 욕망을.

  천진스럽고 귀엽다. 진지하고. 아이라서 그럴까?

  “애야, 갖고 싶은 걸 골라 봐.”, 빨간색?, “이거요.”

  즉시로 생각을 나타내면서 빨간 것을 목에 걸고는

  “아저씨, 고맙습니다.” 하여, 내가 본 장밋빛 얼굴.

  이내 해직 교 5인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뛰어가,

  아이의 모습을 잃어버린 나를 시간이 찾아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석방된 큰형이 아버지와 중학교 진학

  직후 휴학한 막내와 서울로 갔다. 막내는 곧 봉제공장에

  갔다, 나는 내가 번 돈으로 2년 만에 열여덟에 진학했다.

  삼형이 고등학교를 중단하고, 여섯 식구의 생계

  해결하겠다고 돈 3만 원을 빌려 수박 장사를 시작했다.

  여름 오후 수박 대여섯 동이가 든 고무 대야를

  삼형이 계림동 오거리 길모퉁이 인도에 놓고 갔지만,

  대야 앞에 앉아 있는 게 창피해 나는 상점 앞에 가 섰다.

  사치스럽게도 수박 장사가 아닌 것처럼 섰다.

  하나도 못 팔면 식구들이 수박 하나로 배를 채울 텐데,

  거리에 날이 지네! <칼 요한 거리의 저녁>*** 같아 불안해.

  부근의 구루마꾼들은 수박이 싸요, 오백 원, 외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있는 것일까? 배가 덜 고파서 그럴까?

  나는 아주머니가 대야 앞에 멈추는 것을 보았고,

  “이 수박 주인 어디 갔어요?” 소리가 났다.

  “제가 주인이에요.” 조그맣게 소리를 내면서 대야 앞에

  다가갔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

  “학생이? 장사가 말을 해야지. 이것 주게. 얼만가?”

  500을 받고 판 후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볼펜을 판 5시 반경에 그 5인이

  나타났다, 한 사람이 그만하고 가자고 전했다. 그러고선

  “? 이렇게 많이 팔았소?! 그새?!”

  “선생님은 장사에 소질 있는가 봐요.”

  그 여선생의 말까지 뒤따랐다.

  길거리에서 한 장사지만 해직 교사들 생계와 관련 있다.

  장사는 말을 해야 하고 물건 앞에 진지하게 있어야 한다.

  생각이, 전문대에서 나와 걷는 나를 스치고,

  빨간 줄 볼펜을 고르는 꼬마 모습이 뇌리에 어른거린다.

 

 

* 전교조 사건 : 1989년 전후반 안기부의 총괄기획하에 문교부, 법무부, 보안사령부, 경찰 등 11개 국가기관을 총동원해 전방위적인 탄압을 가한 사건

** 민청학련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 1974 4월에 발생한 박정희 유신정권 반대한 시국 사건. 중앙정보부는 1974 4 3일에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을 위반을 이유로 240명을 체포했다. 1975 2 15일 대통령 특별 조치로 인혁당 관련자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형 집행 중지로 석방되었다.

*** Evening On Karl Johan Street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1892). 불안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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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을 팔면서 2020-01-212020-03-16 오전 9:46() 원작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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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9.9.11.(, 현재 시점), 목포전문대

    1975 여름(1), 광주 계림동 오거리

    1989.9.11.(, 현재 시점), 목포전문대

           (9.14. 추석()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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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비즘 기법과 그림 상징

  「볼펜을 팔면서 장사하는 장면  현재로 흐르는 장사하는 장면 - 장사하는 장면으로 시공간이 흘러가는 무비즘 기법으로 구성하였다. 볼펜 장사를 하는 현재의 한 가지의 시간에 두 가지의 시간이 흘러가는, 한 사람에게 두 새의 삶의 시간이 흘러가는, ‘시간의 (세 가지) 색깔을 표현한 무비즘 경향의 글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색깔을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이라는 그림 상징으로 나타냈다.

  <칼 요한 거리의 저녁> 두 유형의 사람이 있다. 저녁에 조명을 받고 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앞쪽으로 걷는, 그렇지만, 하반신이 보이지 않아 걸음을 멈춘 듯한 생각도 들게 하는 군중들, 그리고 그 군중들하고는 떨어진 채 초록색 길을 홀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군중들의 표정이 불안(혹은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홀로 걷는 사람이 흘려내는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이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서 고뇌하고 억압받는 개인으로서의 두려움 없는 세상을 갈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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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돈과 욕망과 말과 진지함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여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또한,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직업을 잃은 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볼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아줌마와 아이는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돈을 사용하고 있다.

  ‘500 에겐 현재 시간과 과거 시간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이다. ‘500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난한 사람의 생계와 관련된 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직업을 잃은 해직 여교사(또는 5인의 해직교사)’에게 500은 무엇일까? ‘500은 단순히 소액이며 생계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은 것, 볼펜 팔기 행사용 물건의 값에 불과한 것일까?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수입이나 재산이 적어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고 어려움)’이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를, ‘가난의 범주를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가난의 의미 해석과 가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둔 글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 측면에서 어려운 상태에 놓인’ ‘전교조 해직교사들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서정적 감정에 주안점을 둔 글이 아니다.

  “장사가 말을 해야지  아주머니 이 사백오십 원밖에 없 유치원생이나 될 남자아이를 통해, ‘사람(개인) 욕망을 잘 실현하려면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하고 을 해야 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글이다.

 

3. 객관적 해석

  그런데 민청학련 사건을 왜 언급할 것일까?

  ‘민청학련 사건의 실체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반독재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 고문과 강압수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희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다. 하지만 이 글엔 민청학련 사건으로 석방된 큰형과 함께 서울로 간 막내는 곧 봉제공장에 갔다라고 한국사회의 한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펜을 팔면서 단순한 슬픈 서정적인 글로 잘못 해석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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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밖 실화

  이 글은, 내가 전교조 결성 건으로 해직된 직후인 1989 9 11()에 일어난 일과, ‘고등학교 1학년 때(1975)에 일어난 일을 재구성하여 표현한 것이다.

  ‘TOF(심장병)’ 때문에 입술이 파랬던 아이인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1973년부터 신문 배달하여 돈을 벌고 번 돈으로 열여덟에 반 1등 성적으로 진학했다. 헌 교과서를 샀고 얻어온 헌 교복을 입고 다니는 가난한 아이여서, 삼형이 하는 수박 장사를 도왔다. 선생들과 학생들은 내가 병든 가난한 아이인지는 몰라서 나를 ‘1등 하는 아이’, ‘그림 잘 그리는 아이’, ‘몹시 허약한 아이로만 여겼다. 내가 상점 앞에 가 섰던 건 아이들이 나의 가난함을 보는 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순수하게 예리하게 청소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었는데, 선생들은 나를 서울대 갈 수 있는 1순위 학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해에 나는 신체적으로(키와 체격이) 다 완성되었고, 다음해부턴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가난하여 고등학교 중퇴한 삼형은 내가 고3이 된 1978년엔 봄부터 어디론가 갔다 오곤 했다. 막내 수와 누나가 매듭을 만들어 팔고, 고교 진학을 포기한 헌이 돈을 벌 수 있는 이 일 저 일을 했다.

  삼형은 1978년에 함평 고구마 투쟁에 앞장섰고, 1978 6 27일의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과 관련해 중책을 맡았고 서울에 문건을 전달한 이후 수배되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1978년 가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우체국 근처에서 뜻밖에 삼형을 만났고 피정센터 언덕으로 가서 함께 푸른 하늘을 본 뒤에 헤어졌다. 그리고 1년 후 1979 11월에 가판대 신문의 남민전 사건 검거 기사에서 큰형과 삼형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1970년대부터 현재(2020)까지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부정적인 정치적 현실과 가난의 문제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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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9-12 해직교사가 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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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 해직교사가 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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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 해직교사가 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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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 해직교사가 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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