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39 여행자와 천 원
나의 무비즘 (37), 실존주의 앙가주망 (32), 리얼리즘 (7)
1992-03
박석준 /
(교정) 시집 2020-05-25 ‘율무차/천 원’
여행자와 천 원
어린 시절에 눈 하나가 시들고 철호와 헤어지고, 나는
지난해에 일숙직 폐지를 위한 설문들을 분석하다 남은
눈이 이상해 작업 후 사무실 사람들 도움으로 수술했다.
보태어 집세 내면 내 밥값 할 돈 3만 원이 부족하지만,
일을 하고 월 십만 원을 받는 곳이어서
2월 초에 사업 평가서를 건네줬는데, 노조 일 하고 싶은데,
나는 오늘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오늘도 어머니가 내 머리맡에 놓고 간 천 원 한 장으로
아침 점심용 200원짜리 율무차 한 잔을 뽑아먹었을 뿐,
쌀이 없는 2월 하순인데 일을 못 하게 해 돌아가야 했다.
일과 알바를 구해놨다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했다.
다방에서 “우리 집으로 가 보면 알아요.” 하여,
집시법을 위반해 얼마 전 석방된 찬웅을 따라
나왔지만, 나는 찬웅 어머니 생각에 불안했다.
“수감된 후에,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알았지요.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이따금 물었어요.”
아들을 의식화시켜 감방 가게 만든 불량한 선생일 텐데,
“안정될 때까지 찬웅이하고 지내세요.” 말이 흘렀다.
나는 2월 말에 노조에 준상근으로 정리하고 목포로 갔다.
나는 찬웅, 호식, 대식, 정리와 함께, 찬웅이 입대한 후엔
인수와도 함께, 노동자들을 만나는 민중학교 일을 했다.
밤이 되면 꽃집으로 가, 나는 중1, 꽃집 작은 아이들과
함께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주 3일은 그렇게 살았다.
“어떻게 사셔서? 뼈만 앙상하고 배가 너무 홀쭉합니다.”
하고, 찬웅 아버지가 40킬로쯤 되는 나를 배려했으나,
4월 초부터 나는 유달산 아래 달동네 3만 원 달방에서
살았다. 아침마다 천 원으로 자판기 율무차 한 잔 먹었다.
월 10만원 받아 교통비 3만 원을 쓰면 만 원이 남았다.
주 2,3회 사무실에 갔으나, 8월의 넷째 월요일,
“나, 일이 바빠서 먼저 나갈 테니, 다음에 만나서….”
소리 후, 일을 기획하던 책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어리석어, 6개월 넘게 말이 단절되고 일에 소외된 나!
나 때문에 슬프다! 생각하고, 그만두겠다 말하고, 나는
거리를 헤맸다. 해 질 무렵, 유동 창 없는 방에서
“많이 야위었구나. 무슨 일 있었냐?”
“이제 돈을 갖다 드릴 수 없어요.” 말이 흘렀다.
“니가 있어서 부담이 되는 것보다야….
동에서 불우이웃이 됐다고 쌀 한 포대를 주더라.
내가 몸 성하면 남의 집 일이라도 할 테니….”
나는 부정맥과 어지러움을 느껴 누워버렸다. 어머니가
내 부은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고 다시 절룩이며 들어와
율무차 한 잔을 건넸다. 약값에 충당할 돈이 없어서.
마감 뉴스가 흘러나오는 옆방으로 가 어머니를 바라봤다.
늙었다. 늙어버렸어! TV 화면이 흔들거리는데,
도움이 되는 소식이 다가가는 것일까?
그제 전추위 교사 해임 뉴스엔 슬퍼하셨는데. 생각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마음 졸였다.
9월이 온 날 나는 꽃집 아주머니, 민중학교 사람들을
작별했다. 밤 광주행 버스에서, 서른다섯 살 아픈 아들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흰 안개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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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1 (율무 /1000원) <원작>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원작 교정: ‘율무차/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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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2020-03-21 ‘율무 /1000원’
여행자와 1000원
어린 시절에 눈 하나가 시들고 철호와 헤어지고, 나는
지난해에 일숙직 폐지를 위한 설문들을 분석하다 남은
눈이 이상해 작업 후 사무실 사람들 도움으로 수술했다.
보태어 집세 내면 내 밥값 할 돈 3만 원이 부족하지만,
일을 하고 월 십만 원을 받는 곳이어서
2월초에 사업평가서를 건네줬는데, 노조 일 하고 싶은데,
나는 오늘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오늘도 어머니가 내 머리맡에 놓고 간 1000원 한 장으로
아침 점심용 200원짜리 율무 한 잔을 뽑아먹었을 뿐,
쌀이 없는 2월 하순인데 일을 못 하게 해 돌아가야 했다.
일과 알바를 구해놨다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했다.
다방에서 “우리집으로 가 보면 알아요.” 하여,
집시법을 위반해 얼마 전 석방된 찬웅을 따라
나왔지만, 나는 찬웅 어머니 생각에 불안했다.
“수감된 후에,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알았지요.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이따금 물었어요.”
아들을 의식화시켜 감방 가게 만든 불량한 선생일 텐데,
“안정될 때까지 찬웅이하고 지내세요.” 말이 흘렀다.
나는 2월말에 노조에 준상근으로 정리하고 목포로 갔다.
나는 찬웅, 호식, 대식, 정리와 함께, 찬웅이 입대한 후엔
인수와도 함께, 노동자들을 만나는 민중학교 일을 했다.
밤이 되면 꽃집으로 가, 나는 중1, 꽃집 작은 아이들과
함께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주 3일은 그렇게 살았다.
“어떻게 사셔서? 뼈만 앙상하고 배가 너무 홀쭉합니다.”
하고, 찬웅 아버지가 40킬로쯤 되는 나를 배려했으나,
4월초부터 나는 유달산 아래 달동네 3만원 달방에서
살았다. 아침마다 1000원으로 자판기 율무 한 잔 먹었다.
월 10만원 받아 교통비 3만원을 쓰면 만원이 남았다.
주 2,3회 사무실에 갔으나, 8월의 넷째 월요일,
“나, 일이 바빠서 먼저 나갈 테니, 다음에 만나서….”
소리 후, 일을 기획하던 책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어리석어, 6개월 넘게 말이 단절되고 일에 소외된 나!
나 때문에 슬프다! 생각하고, 그만두겠다 말하고, 나는
거리를 헤맸다. 해질 무렵, 유동 창 없는 방에서
“많이 야위었구나. 무슨 일 있었냐?”
“이제 돈을 갖다 드릴 수 없어요.” 말이 흘렀다.
“니가 있어서 부담이 되는 것보다야….
동에서 불우이웃이 됐다고 쌀 한 포대를 주더라.
내가 몸 성하면 남의 집 일이라도 할 테니….”
나는 부정맥과 어지러움을 느껴 누워 버렸다. 어머니가
내 부은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고 다시 절룩이며 들어와
율무차 한 잔을 건넸다. 약값에 충당할 돈이 없어서.
마감뉴스가 흘러나오는 옆방으로 가 어머니를 바라봤다.
늙었다. 늙어버렸어! TV 화면이 흔들거리는데,
도움이 되는 소식이 다가가는 것일까?
그제 전추위 교사 해임 뉴스엔 슬퍼하셨는데. 생각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마음 졸였다.
9월이 온 날 나는 꽃집 아주머니, 민중학교 사람들을
작별했다. 밤 광주행 버스에서, 서른다섯 살 아픈 아들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흰 안개꽃을 생각했다.
--2020-03-21 오전 5:04 (완) (율무 /1000원)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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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3. 12:12.내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5-93-1.hwp <원작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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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 ∼ 2020-03-05 <1000원>
+ 2020-02-16 ∼ 2020-03-01 <여행자>
= 2020.03.09. 05:11.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4-2.hwp <여행자 원본>
+ 2020.04.23. 14:28.메. 저자문의-답.hwp (탈자 첨가: 율무차/율무차) = (원작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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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991-가을 (일숙직 폐지 설문 작업, 눈 수술)
1992-2월 하순 (생활고와 일의 소외) : 1연
1992-2월 말 (목포로 떠남) : 2연
1992-4월 이후 (달동네 생활) : 3연
1992-08-22 (토, 집에 옴, 뉴스),
*1992년 6월부터 9월까지 전추위(교육대개혁과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한 전국교사추진위원회) 교사 13명을 해임했음.
1992-08-24 (월, 사무실 떠남) : 4연
1992-09-01 (화, 목포에서 떠나 광주로 돌아감) : 5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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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집과 관련한 해석
1. 여행의 발단 : ‘눈’과 ‘소외’
「여행자와 천 원」은 자서전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에 실린 글인데, 이 시집의 글 「먼 곳 4 ― 수감된 거리에 서면」이라든가 「초대」, 「장밋빛 인생」과 연결된다. 「초대」에서 “찬웅이 어머니”와 관련한 일이, 「장밋빛 인생」에서 “심장에 이상이 생겨 다리와 발등이 붓는다”는 사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렸다.”가 의미하는 것은 ‘소외’이다. ‘소외’는 무리나 조직과 관련된 현상이며, 철학적 의미로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이다. “나”는 “노조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을 못 하게 해”서 “사무실”에서 떠난다. “나”의 “눈”이 결격 사유가 된 것이다. “나”가 5년 전에 “이제 수감된 거리에 서면 나는 불안한 눈, 가는 다리로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먼 곳 4」)라고 생각한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의미하는 ‘자기 소외’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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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휘
“천 원”과 “율무차”는 사람의 최소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이다.
“흰 안개꽃”은 맑고 순수한 마음, 기쁨, 약속, 사랑의 결실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가 “꽃집”에서 일했기 때문에 ‘안개꽃’으로 글이 끝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늙었다. 늙어버렸어!”는 우선적 의미가 ‘어머니가 늙었다.’인데 “TV 화면이 흔들거리는데”라는 말이 바로 연결되면서 ‘TV가 낡았다’로, 이어 “가난하다”로 의미가 변화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가난함’이 버무려진다.
“노조 일”을 하지 못하게 된 “나”는 실존하고 싶어서 이와 유사한 일인 “노동자들을 만나는 민중학교 일”을 선택한다.
“내 부은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고 다시 절룩이며 들어와”에서 “나”는 “어루만지고”, “다시 절룩이며 들어와”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면서도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나의 슬픔’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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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목의 뉘앙스
제목에 사용된 “여행자”는 국어사전의 ‘여행자 : 일정한 기간 동안 집을 떠나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에서 조금 어긋난 뉘앙스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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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향
「여행자와 천 원」에서 “나”는 “나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하고, “이제 돈을 갖다 드릴 수 없어요.” 말한다. 하지만 이 글은 가난한 해직교사의 삶의 고통과 비애를 표현한 글이 아니다. “아들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흰 안개꽃을 생각”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조리 인간(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존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실존을 시도한 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실존주의 경향의 글이다. 또한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정(소외, 배려 등), 사람들의 관계를 시각적인 형용사(가는) 동적 심상의 동사(건네줬는데 / 흘렀다 / 부은 / 어루만지고 / 절룩이며 / 흔들거리는데)를 통해 무비즘 경향으로 형상화한, 삶을 그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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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나는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 「여행자와 천 원」, 「광주 유동 박제방」, 이 두 편의 글을 썼다. 「여행자와 천 원」에는 ‘갈매나무’ 대신 ‘흰 안개꽃’으로 끝 문장을 만들었고, ‘어리석다’, ‘슬프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광주 유동 박제방」은 제목만 유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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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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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문재 시인께 보낸 편지
‘1000원’과 ‘여행자’ 두 글이 내용 중복이 많은 것 같아 통합하여 ‘여행자와 1000원’으로 고쳐 썼습니다.
54줄(3p)과 거기에 첨가한 61줄(4p)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93-2에 두 글을 붙여놨습니다.).
이 중 나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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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A) 2020-03-17 (54줄)
여행자와 1000원
어린 시절에 눈 하나가 시들고 철호와 헤어지고, 나는
지난해에 일숙직 폐지를 위한 설문들을 분석하다 남은
눈이 이상해 작업 후 사무실 사람들 도움으로 수술했다.
보태어 집세 내면 내 밥값 할 돈 3만 원이 부족하지만,
일을 하고 월 십만 원을 받는 곳이어서
2월초에 사업평가서를 건네줬는데, 노조 일 하고 싶은데,
나는 오늘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오늘도 어머니가 내 머리맡에 놓고 간 1000원 한 장으로
아침 점심용 200원짜리 율무 한 잔을 뽑아먹었을 뿐,
쌀이 없는 2월 하순인데 일을 못 하게 해 돌아가야 했다.
일과 알바를 구해놨다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했다.
다방에서 “우리집으로 가 보면 알아요.” 하여,
집시법을 위반해 얼마 전 석방된 찬웅을 따라
나왔지만, 나는 찬웅 어머니 생각에 불안했다.
“수감된 후에,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알았지요.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이따금 물었어요.”
아들을 의식화시켜 감방 가게 만든 불량한 선생일 텐데,
“안정될 때까지 찬웅이하고 지내세요.” 말이 흘렀다.
나는 2월말에 노조에 준상근으로 정리하고 목포로 갔다.
나는 찬웅, 호식, 대식, 정리와 함께, 찬웅이 입대한 후엔
인수와도 함께, 노동자들을 만나는 민중학교 일을 했다.
밤이 되면 꽃집으로 가, 나는 중1, 꽃집 작은 아이들과
함께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주 3일은 그렇게 살았다.
“뼈만 앙상하시네. 꽃집 애들도 사십킬로는 넘던데….”
하며, 목욕탕을 영업하는 찬웅 아버지가 배려했으나,
4월초부터 나는 유달산 아래 달동네 3만원 달방에서
살았다. 아침마다 1000원으로 자판기 율무 한 잔 먹었다.
월 10만원 받아 교통비 3만원을 쓰면 만원이 남았다.
주 2,3회 사무실에 갔으나, 8월의 넷째 월요일,
“나, 일이 바빠서 먼저 나갈 테니, 다음에 만나서….”
소리 후, 일을 기획하던 책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어리석어, 6개월 넘게 말이 단절되고 일에 소외된 나!
나 때문에 슬프다! 생각하고, 그만두겠다 말하고, 나는
거리를 헤맸다. 해질 무렵, 유동 창 없는 방에서
“많이 야위었구나. 무슨 일 있었냐?”
“이제 돈을 갖다 드릴 수 없어요.” 말이 흘렀다.
“니가 있어서 부담이 되는 것보다야….
동에서 불우이웃이 됐다고 쌀 한 포대를 주더라.
내가 몸 성하면 남의 집 일이라도 할 테니….”
나는 부정맥과 어지러움을 느껴 누워 버렸다. 어머니가
내 부은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고 다시 절룩이며 들어와
율무차 한 잔을 건넸다. 약값에 충당할 돈이 없어서.
마감뉴스가 흘러나오는 옆방으로 가 어머니를 바라봤다.
늙었다. 늙어버렸어! TV 화면이 흔들거리는데,
도움이 되는 소식이 다가가는 것일까?
그제 전추위 교사 해임 뉴스엔 슬퍼하셨는데. 생각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마음 졸였다.
9월이 온 날 나는 꽃집 아주머니, 민중학교 사람들을
작별했다. 밤 광주행 버스에서, 서른다섯 살 아픈 아들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흰 안개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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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54줄 교=초고A)
= 2020.03.18. 11:43.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5-93-2.hwp (초고A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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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B) 2020-03-17 (61줄)
여행자와 1000원
어린 시절에 눈 하나가 시들고 철호와 헤어지고, 나는
지난해에 일숙직 폐지를 위한 설문들을 분석하다 남은
눈이 이상해 작업 후 사무실 사람들 도움으로 수술했다.
보태어 집세 내면 내 밥값 할 돈 3만 원이 부족하지만,
일을 하고 월 십만 원을 받는 곳이어서
2월초에 사업평가서를 건네줬는데, 노조 일 하고 싶은데,
나는 오늘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오늘도 어머니가 내 머리맡에 놓고 간 1000원 한 장으로
아침 점심용 200원짜리 율무 한 잔을 뽑아먹었을 뿐,
쌀이 없는 2월 하순인데 일을 못 하게 해 돌아가야 했다.
일과 알바를 구해놨다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했다.
다방에서 “우리집으로 가 보면 알아요.” 하여,
집시법을 위반해 얼마 전 석방된 찬웅을 따라
나왔지만, 나는 찬웅 어머니 생각에 불안했다.
“수감된 후에,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알았지요.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이따금 물었어요.”
아들을 의식화시켜 감방 가게 만든 불량한 선생일 텐데,
“안정될 때까지 찬웅이하고 지내세요.” 말이 흘렀다.
‘나는 여행을 떠난다. 나를 파열하고
가기 때문에 후회할 테지만, 노조운동의
어느 부분에라도 가 있고 싶어서.’라고 생각하고
나는 2월말에 노조에 준상근으로 정리하고 목포로 갔다.
나는 찬웅, 호식, 대식, 정리와 함께, 찬웅이 입대한 후엔
인수와도 함께, 노동자들을 만나는 민중학교 일을 했다.
밤이 되면 꽃집으로 가, 나는 중1, 꽃집 작은 아이들과
함께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주 3일은 그렇게 살았다.
“뼈만 앙상하시네. 꽃집 애들도 사십킬로는 넘던데….”
하며, 목욕탕을 영업하는 찬웅 아버지가 배려했으나,
4월초부터 나는 유달산 아래 달동네 3만원 달방에서
살았다. 아침마다 1000원으로 자판기 율무 한 잔 먹었다.
월 10만원 받아 교통비 3만원을 쓰면 만원이 남았다.
주 2,3회 사무실에 갔으나, 8월의 넷째 월요일,
“나, 일이 바빠서 먼저 나갈 테니, 다음에 만나서….”
소리 후, 일을 기획하던 책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어리석어, 6개월 넘게 말이 단절되고 일에 소외된 나!
나 때문에 슬프다! 생각하고, 그만두겠다 말하고, 나는
거리를 헤맸다. 해질 무렵, 유동 창 없는 방에서
“많이 야위었구나. 무슨 일 있었냐?”
“이제 돈을 갖다 드릴 수 없어요.” 말이 흘렀다.
“니가 있어서 부담이 되는 것보다야….
동에서 불우이웃이 됐다고 쌀 한 포대를 주더라.
내가 몸 성하면 남의 집 일이라도 할 테니….”
나는 부정맥과 어지러움을 느껴, 3면의 책장이 있고
서랍 하나가 없는 고물 책상과 그 위 녹음기가 있는
방의 이불 위에 누워 버렸다. 어머니가
내 부은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고 다시 절룩이며 들어와
율무차 한 잔을 건넸다. 약값에 충당할 돈이 없어서.
마감뉴스가 흘러나오는 옆방으로 가 어머니를 바라봤다.
늙었다. 늙어버렸어! TV 화면이 흔들거리는데,
도움이 되는 소식이 다가가는 것일까?
그제 전추위 교사 해임 뉴스엔 슬퍼하셨는데. 생각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마음 졸였다.
9월이 온 날 나는 꽃집 아주머니, 민중학교 사람들을
작별했다. 꽃집 아주머니는 교통비 하라고 너무 많은 돈
이십만 원을 줬다. 어머니에게 드릴 남은 돈 십오만 원을
가지고 밤 광주행 버스에서, 서른다섯 살 아픈 아들
가는 다리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흰 안개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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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 2020-03-17 오후 4:49 (초고B. 61줄)
= 2020.03.18. 11:43.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5-93-2.hwp (초고B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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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2020-03-09
1000원
지난해에 일숙직 폐지를 위한 설문들을 분석하다
이상이 생겨 작업 후 사무실의 도움으로 눈 수술했는데.
월 십만 원을 받는 노조 일을 하기에
2월초에 사업평가서를 건네줬는데.
‘그 사람’은 논의를 거절한다. 나는 일하고 싶은데,
어머니가 오늘도 내 머리맡에 놓고 간 1000원 한 장으로
아침 점심용 200원짜리 율무 한 잔을 뽑아먹었을 뿐.
쌀이 떨어지는데 2월 하순, 어떻게 살 것인가?
가야겠다, 일과 알바를 구했다고 찬웅이가 전화했으니.
“무슨 낯으로……? 안 갈란다. 나를 원망하셨을 텐데.”
“어머니가 구해 놓은 자립니다.”
나는 가냘픈 문제아일 텐데. 집시법을 위반하여 얼마 전
석방된 찬웅은 어른이 되어 목포터미널다방에 앉아 있다.
“수감된 후에,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는 걸 알았지요.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냐고 이따금 물었어요.”
이상하다! 날 반겼지만, 나를 기억한다. 조심해야겠다.
“누추한 방이지만 안정될 때까지 찬웅이하고 지내세요.”
말이 음성의 빛깔까지 동반한 채로 뇌리에 흘러간다.
나는 2월말에 노조에 준상근으로 정리하고, 목포로 갔다.
아침에 찬웅과 함께 ‘민중학교’로 가 노동자들을 만나고,
밤에 꽃집으로 가, 찬웅이 조카처럼 대하는 중1
작은 소년들, 꽃집 아이와 그 사촌 아이와 함께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주 3일은 그렇게 살았다.
“찬웅아, 피로하실 텐데, 선생님 모시고 목욕탕에 가라.”
찬웅 아버지가 영업하는 목욕탕에서 3월 중순 해질 무렵
“뼈만 앙상하네요. 배가 홀쭉하고. 선생님도 재 보십쇼.”
소리가 웃통을 벗은 나에게 파고든다.
“어떻게 사셨기에? 조카애들도 사십 킬로는 넘던데…….”
나는 비탈진 달동네 3만원 월세방을 4월초에 빌렸다.
아침 되면 1000원으로 자판기 율무차 한 잔을 먹었다.
월 10만원 받아 교통비 3만원을 쓰면 만원이 남았다.
9월이 온 날, 아침에 장미꽃, 안개꽃을 섞어 꽃병에 넣은
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광주로 돌아간다.
나는 주 2,3회 노조에 갔으나 8월까지 일이 단절되어서.
8월에 부정맥이 잦고 몸이 몹시 수척해져서.
여행자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난다. 10만 원은 벌 수 있었던,
집세 내면 내 밥값 할 돈 3만 원이 부족하지만,
일하고 싶은 노조 사무실인데.
나는 나를 파열하고 떠나기 때문에, 후회할 테지만.
노조 운동의 어느 부분에라도 가 있지 못한다면
내게 돈이 무슨 소용 있는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민중학교’ 개설 운용 일을,
월 10만 원을 벌 수 있는 꽃집 아르바이트를
찬웅이 구해서, 나는 준상근으로 전환하고
2월 말에 목포로 떠났다. 찬웅은 4월에 입대했다.
8월 넷째 토요일 대문을 들어갔는데, 굴속 같은 방에서
나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나를 살핀다.
“밥은 먹고 왔어요.” 하였지만
침침한 방안 이불 위에 엎드린 채로 생각이 흐른다.
그제도 사무실에서 나를 피했다! 나의 일을 할 수 없게.
서랍 하나가 없는 고물 책상과 그 위 낡은 녹음기,
그 옆 어머니가 갖다 놓은 미숫가루물 담은 그릇이,
책이 끼워진 3면의 책장들이 채워져 있는데….
마감뉴스가 흘러나오는 옆방으로 가 어머니를 바라본다.
늙었다. 늙어버렸어! TV 화면이 흔들거리는데,
도움이 되는 소식이 다가가는 것일까?
주가 폭락, 이게 어머니에게 관련 있는 걸까?
전추위 교사 해임, 이것은 관심 있을 테지.
내 방으로 돌아간다. 어머니의 신음 소리에 마음 졸인다.
“나, 일이 바빠서 먼저 나갈 테니, 다음에 만나서…….”
뺨에 그늘이 생길 정도로 쇠약해진 사람에게…….
또 일로부터 소외됐구나!
내가 일을 기획하던 책상이 없어진 걸 안 후,
몸이 아프지만, 노조 일을 할 수 없다면,
돈이, 알바가 무슨 소용 있는가?
해질 무렵, 어머니가 마루에 나와서 나를 살핀다.
“이제 돈을 갖다 줄 수 없어요.”
“니가 있어서 부담이 되는 것보다야…….
내가 몸 성하면 남의 집 일이라도 할 테니…….”
나는 침침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8월의 넷째 월요일,
다리와 발등이 부어 있어 이불 위에 누워 버린다.
어머니가 책상에 콩물 사발을 내려놓는다.
내가 몸이 몹시 수척해져서. 약값을 충당할 돈이 없어서.
9월의 첫 아침 꽃집으로 찾아갔다. 아주머니가
“노조 사무실 일 때문이라면, 가셔야지요.”
하고는 교통비 하라며 너무 많은 돈, 이십만 원을 줬다.
나는 ‘민중학교’ 일을 함께한 호식, 대식, 인수, 정리와
송별 저녁식사를 하고, 광주의 집에 돌아갔다.
남은 십오만 원을 어머니에게 바로 드렸다.
어머니는 곧 책상에 율무차 잔을 갖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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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6-20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
2020-01-12 ∼ 2020-03-05 <1000원>
+ 2020-02-16 ∼ 2020-03-01 <여행자>
= 2020.03.09. 05:11.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4-1.hwp (메모 원본)
= 2020.03.09. 05:11.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4-2.hwp (메모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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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적 배경: <1000원>
1991 가을 (일숙직 폐지 설문 작업, 눈 수술)
1992 2월 하순 (일의 소외로 고민), 2월말(떠남)
1992 3월 중순 (찬웅네의 배려)
1992 4월 이후 (달동네 생활)
1992 9월 1일 (꽃집 알바, 민중학교 일 그만둠)
시간적 배경: <여행자>
1992. 2월 말 (사무실 준상근 전환, 목포로 감, 1연)
1992.8.22. (토, 집에 옴, 2연),
8.20 (목, 사무실, 논의 피함)
*전추위(교육대개혁과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한 전국교사추진위원회) 교사 13명을 1992년 9월까지 해임함.
1992.8.24. (월, 사무실, 논의 피함, 3연),
1992.8.31. (월, 노조 일 그만둠)
1992.9.1. (화, 목포 민중학교, 꽃집알바 그만둠, 광주로 돌아감, 4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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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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