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5 생의 프리즈 ― 절규
나의 무비즘 (5), 실존주의 앙가주망 (3)
1973 / 1989-09-09
박석준 /
생의 프리즈 ― 절규*
70년, 중1 나는 짝 현기, 영주·상우와 새 친구가 되었다.
넷은 함께 외국영화를 보고, 공원으로 걸어가 놀았다.
중2에 진급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태섭을 처음 만났다.
겨울에도 도시락 반찬은 갓김치나 고추장이었다.
빈 도시락인 날에는 점심시간이 되면 교실에서 나갔다.
겨울 낮에 돌아와 내 책상에 든 튀김닭을 보고,
태섭이……? 생각에 2주 전에 짝이 됐을 뿐이라 번민했다.
납부금을 독촉해서 며칠간 결석한 나를 담임이 불렀다.
뒷집 사는 친구 국민학교 1학년 때 짝 국주에게 권했다.
네 돈으로 공원 옆 양림동 헌책방에서 교과서 사주라고.
“됐어. 사줬다고 할 테니까.” 걸어간 책방에서 말했다.
“집이 서울로 이사가.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하면서 졸업식 날 현기가 1분쯤 남긴 슬퍼하는 눈.
나는 곧 돈을 벌기 위해 신문 배달 일을 선택했다.
여름 소낙비가 쏟아지는 어느 오후,
비를 피하려고 광주극장 입구 앞 공간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서 있는 지 1분쯤 안에,
파란색 해진 교복 상의를 입은 고등학생 삼형,
학교에서 신으라는 검정색 스파이크를 살 돈이 없어
흰 운동화에 먹물 들인 중학생 헌,
육성회비를 안 내 교실 구석에 서 있었다는 국민학생 수,
차례로 들어왔다. 들어간 사람과 들어온 사람의
신문과 놀란 눈. 이상한 ‘빗속의 해후’!
비가 그치자, 넷은 그곳에서 갈 길로 걸어갔다.
가을 해 질 녘, 두 종류 신문을 배달하러 지름길 궁동 길로
걸었다. 다리 아파 길바닥에 눈길을 주곤 했다. 그러다가
그림자 하나가 길바닥에서 움직이지 않아서 본
고1 교복, 태섭이, 상대방을 응시하는 연민하는 눈.
‘왜 그런 눈으로? 왜 그냥 가지 않고서…….’
그림자가 1분쯤 머무르다 바로 옆 골목길로 걸어갔다.
나는 번 돈으로 75년에 진학했다. 그러나 새해 1월에
눈을 다쳐 눈에 통증이 심해져 그해에 휴학했다.
다리가 점점 가늘어져 두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자,
누나가 책을 읽어주고, 빵 배달 헌이 빵을 약 대신하라고
가져다줬다. 여름에 눈 하나, 정원의 칸나가 시들었다.
쌀이 떨어져 엄마랑 누나가 무등산에 정금 따러 가면
앉아서 모나미볼펜을 굴려 보고 인생을 점치거나
아픈 눈으로 누워 벽 혹은 천장을 보거나 하였다.
병원에서 TOF라 판명하고 그해를 못 넘길 거라 했다.
남은 건 내가 처리할 테니, 먼저들 가.”
9월의 토요일, 한 시경 북적거리는 항구도시 터미널에서
같은 배포조인 신재용 선생과 한 사람이 나와 헤어졌다.
‘시민 여러분들의 격려를 부탁드립니다.’란 말과
지회 해직 교사 명단이 담긴 유인물을
줄 서 있는 사람이 받는 대로 전했는데,
나를 막을 듯이 불쑥 내미는 한 손.
먼 곳에서 만난 사람, 1분쯤 응시하는 동경하는 눈.
그 손에 유인물을 건네고, 걸음을 옮기며 생각이 스쳤다.
산다는 건 눈과 다리로 사람에게도 걸어간다는 것! 일까?
* Frieze of Life ― The Scream :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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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2020-03-16 오후 04:37(완)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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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70(중1) ⁓ 1972(중3), 1973 ⁓ 1974,
1975(고1), 1976(휴학)
1989.9.9.(토, 해직교사 현재 시점)
(1989.8.14 해직, 9.14. 추석(목)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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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염세주의적인 뭉크의 ‘생의 프리즈’
이 글은 그림이라는 단어도 없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그런데 왜 글 제목에 뭉크의 그림 제목 ‘생의 프리즈 ― 절규’을 가져왔을까?
‘생의 프리즈’는 화가가 기획했던 것이 아니라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생활 속에서 삶, 사랑, 죽음의 시로 분류되어 정립된 것이다. ‘생의 프리즈’에 속하는 작품의 수는 정확하게 분류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죽음이나 병과 고통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염세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로 그의 가족의 죽음과 병력과 무관하지 않는데, <병든 아이>, <봄>. <불안>. <절규>. <죽음의 방> 등의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절규>는 공포스러우면서도 놀라는 표정과 흘러가는 듯한 배경을 그려 내어,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하였다. 뭉크는 이 그림과 관련해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나는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여성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로 남성을 괴롭히고 끝내 파멸시키는 흡혈귀와도 같은 이미지로 <키스>. <질투>. <살로메>. <여름날>, <흡혈귀> 등이 여기에 속한다.*
2. 소재: ‘4가지 눈’과 ‘나의 눈’
중1 때(1970년)의 시간부터 시작한 이 글에는 4가지 눈을 표현하고 있다; 슬퍼하는 눈, 놀란 눈, 연민하는 눈, 동경하는 눈. 그리고 ‘빗속의 해후’, ‘해 질 녘의 신문 배달’, ‘칸나’와 ‘나의 한 눈’, ‘TOF’라는 말이 나온다.
3. 슬퍼하는 눈
이 중 현기의 “슬퍼하는 눈”은 함께 ‘외국영화’를 보고 ‘공원’으로 걸어간 시간을 담고 있고 그 시간의 끝을 암시하는 눈이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된 후엔 “산다는 건 눈과 다리로 사람에게도 걸어간다는 것! 일까?”라는 삶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한 씨앗으로 남는다.
한편, 현기는 나와 헤어졌지만, 현기의 “슬퍼하는 눈”은 ‘빗속의 해후’라는 상념을 가져온다. 현기와 영화를 보았고 ‘빗속의 해후’가 영화이기 때문이다.
“빗속의 해후”는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의 장편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1958)을 영화화한 이탈리아 영화의 제목이다.
항구도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계기로 이 도시의 유명한 실업가 부인 안(Anne)의 미묘하게 동요하는 심리상태와 한 청년 노동자(Chauvin,)와의 접촉을 묘사한 누보 로망풍(風)의 작품으로서 P.브룩에 의하여 1960년에 영화화되었다. 영화에서 ost로 작곡가 안토니오 디아벨리(Antonio Diabelli, 1781~1858)의 변주곡 <moderato cantabile>을 차용한 분위기있는 테마는 미셀 클레망 악단의 연주로 잘 알려져 있다.**
4. 무비즘 : 빗속의 해후, 놀란 눈
그런데 이 글에선 네 형제가 소낙비가 내리는 오후에 극장(영화를 보는 곳) 입구 앞 공간에서 해후하자 곧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본다. 이것은 신문 배달이라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가난함)을 확인한 순간에 나타난 눈인데, 뒤이어 나에게 “이상한 ‘빗속의 해후!’”라는 상념과 이미지를 일으킨다. 그러고는 비가 그치자 네 형제는 극장 앞에서 갈 길로(네 방향으로 나뉘어져) 걸어간다.
이 글에 사용된 ‘해후’는 ‘⓵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만남, ⓶ 사람이나 사물을 우연히 마주침’이라는 두 가지의 사전적 의미를 다 지니고 있다. ⓵은 나와 현기와 연결되는 것이며 ⓶는 나와 세 형제가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나에게 인생을, 이미지로 남은 어떤 시간을 의미한다.
또한 어느 시기에 사람들이 함께 같은 일을 하여 인생의 일부분을 공유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겐 자기가 가야 할 길(인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서로가 함께한 시간(빗속의 해후)이 있었지만 그것이 의미로 새긴 사람(나)에게만 이미지로 새겨진다, 시간은 서로에겐 보통 빠르기로 흐르는 (노래할 수 있는) 칸타빌레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낳게 한다.
네 형제가 극장 앞 공간에서 ‘빗속의 해후’를 한다. ‘빗속의 해후’는 영화의 제목이며 영화 속에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음악이 흐른다는 점에서 현기와 연결되어 ‘인생’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인생은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의미로 남는다. 이 글은 ‘비, 극장 앞에 모여든 네 형제, 영화’가 오버랩되면서 인생의 시간이 빗속에 흘러가는 동적 이미지를 새겨내는 무비즘의 경향을 보여준다.
5. TOF(팔로4징후)
이 글이 나오기 10년 전에 나온 시집 『카페, 가난한 비』에서 변해간 나의 형상은 열 살 무렵의 ‘고독한 아이’(「언덕의 아이」), 중2 때의 ‘그림을 그리며 입술이 파랬던(파란) 아이’(「한 소년」)이다. 이런 글들과 그 속의 이야기가 이 글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할 수 있는 단서는 “입술이 파랬던 아이” 단 하나뿐이다.
그런데 이 글이 실린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에는 ‘함께 의원에 갔다가 아버지가 해 질 무렵에 공원의 정자에 앉혀놓은 중1 아이’와 ‘팔로4징후’라는 말이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라는 글에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나는, 중2 때 ‘가난 때문에 번민한 아이’,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신문 배달을 선택한 아이’, ‘번 돈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 ‘눈을 다친 아이’, ‘휴학하고 다리가 가늘어진 아이’, ‘병명이 늦게야 “TOF”로 판명된 아이’로 변해 간다. 이 중 “TOF”는 이 글이 「한 소년」의 이야기와 관련성 있음을 암시한다.
“TOF”는 “입술이 파랬던 아이”가 겪고 있는 병의 이름이다.
‘TOF(팔로4징후)’는 어떤 병으로 인해 입술과 손발이 파래지는 증세(청색증)가 나타나며, 우심실 비대, 심실중격결손증(심실벽에 구멍이 뚫어져서 피가 샘), 대동맥 기승, 폐동맥협착증까지 4가지 징후가 나타난다는 것을 팔로씨가 발견하여 명명된 희귀한 선천적 심장병이다. 역류에 따른 심부전증, 부정맥 등이 발생하여 사망에 이르는 병이다.
6. 연민하는 눈
중2 때(1971년)에 짝이었던 태섭으로 인해 나는 번민했다. 그리고 1973년 해 질 녘에 다시 만난 태섭에게서 나는 “연민하는 눈”을 느꼈고 “왜 그런 눈으로?”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한다. 그런데 이 눈과 함께 “고1 교복”이 강한 이미지로 남아버려서 나는 번 돈으로 75년에 진학한다. 태섭의 “연민하는 눈”은 나에게 ‘존재자로서 나의 의미’와 ‘나의 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하고 공부를 할 결심을 하게 하였음을 암시한다.
7. ‘나의 눈’과 ‘칸나’
나는 중2 봄까지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집과 2개의 가게건물, 정미소 등을 소유했는데, 가게 옆 신발집 모퉁이에서 꺾인 길에서 10분쯤 걸으면 나오는 3거리의 양쪽 길을 낀 두 번째 집이 안집이었다. 계림동 그 집은 왼쪽 길가에 살림방과 부엌이 딸린 6개의 가게, 오른쪽 길가에 2개의 방이 딸린 술집, 큰 창고, 아랫방 두 개가 있고, 공부방(이 글에 나오는 방) 등 방 4개인 안채, 안채 앞쪽의 굴뚝이 솟은 큰 정원 등으로 이루어진,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정원에선 굴뚝을 따라 올라가는 등나무, 장미, 칸나, 작약, 난초, 맨드라미, 백일홍, 분꽃, 국화, 채송화, 꽈리, 석류나무, 사철나무, 앵두나무, 이름 모르는 여러 종의 꽃나무가 살았다. ‘칸나’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꽃나무였다.
우리 식구들은 우리 집인데도 빚 때문에 왼쪽 6개의 가게를 잃었고 안방을 내주었다. 내가 고1 때엔 술집의 뒷방으로 이사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비좁아서 책상을 놓을 공간이 없고 창 없는 그 방에서 백열전등 아래 서서 공부하다가 내가 눈을 다쳤다.(→ 「아픈 수업」) 내가 휴학하고 그 방 앞의 공부방으로 이사했는데, 공부방에서 내 다리가 가늘어져가고 두 눈이 흐릿해져갔다. 칸나를 글에 넣은 까닭은 칸나가 시들었을 때 공부방에서 나의 한 ‘눈’도 시들어버려서 ‘산다는 것’의 상념과 함께 ‘산다는 것’의 이미지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생의 프리즈 ― 절규’라는 그림이 흘러가는 이미지를 낳는다.
8. 그림과 나의 인생
제목인 ‘생의 프리즈 ― 절규’는 뭉크의 그림이며, 그림과 관련한 나의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하게 한 그림이다.
9. 동경하는 눈
글의 마지막에서 내가 ‘먼 곳’의 교사가 되었다는 것과 ‘먼 곳’에서 해직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 곳’은 내가 근무하던 사립학교다. 터미널에서 본 ‘먼 곳에서 사람은 (‘먼 곳’ 재단에서 파견한 사람인데,) 내가 해직을 선택한 것은 가고 싶은 길을 찾아간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경하는 눈’을 나에게 건넨 것이다.
‘배포’는 ‘나누어줌’이라는 의미이며 ‘배달’의 ‘날라다 줌’과는 행위자의 색깔이 다르다.
10. 나의 글 「생의 프리즈 ― 절규」의 의미 : 절실한 장식
뭉크의 그림 제목에서 이 글의 제목을 가져왔지만, 그리고 <절규>처럼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하였지만, “산다는 건 눈과 다리로 사람에게도 걸어간다는 것! 일까?”라고 끝을 맺고 있는 까닭에 이 글은 염세주의 색채와는 무관한 글이다.
또한 이 글이 실린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를 가족사, 한국운동사, 남민전의 계승이 얽힌 시집이라고 일반적으로 평하는데, 이 글은 ‘인생의 프리즈’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집 제목이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라는 점에서 ‘시간’이 ‘인생’을 대신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이 글과 시집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뭉크는 ‘생의 프리즈 ; 사람, 사랑, 죽음에 관한 시’라고 부른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비밀을 탐사하듯 인간 내면의 심리와 존재자로서의 고독과, 불안, 공포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었다.
프리즈(Frieze)는 ⓵이중적으로 짠 표면에 거친 보풀이 있는 두꺼운 모직물, ⓶ 건축물의 외면이나 내면, 기구의 외면에 붙인 띠 모양의 장식 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러나 나의 글 「생의 프리즈 ― 절규」에는 염세주의적 색채가 없다. ‘절실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있는 장식들을 추적하면서 1970년부터 1989년까지 20년간의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이 글은 자세히 봐야 흘러가는 듯한 이미지로 보이는, 그림과 영화의 한 장면 또는 음악이 사용된 고도의 수법(무비즘)으로 인생을 표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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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한 사이트: 영화이야기 ‘에드바르 뭉크 – 생의 프리즈’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armada0219&logNo=221420015000
** 참고한 사이트: 영화 빗속의 해후 ost
https://m.cafe.daum.net/isbobyb/F0xQ/13252?listURI=%2Fisbobyb%2FF0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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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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