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36 일상 2 ― 89. 8. 29의 비
나의 무비즘 (34), 실존주의 멜랑콜리 (1), 앙가주망 (28)
1989-08-29
박석준 /
<원작>
일상 2 ― 89. 8. 29의 비
장면(場面) 같은 오늘,
비가 오고
내가 가는 길 속으로
우수가 들어섰다.
비는 전날에도 왔었건만
세월이 흐를수록 비는
슬픔으로 흘렀던가 싶다.
비, 비가 오고 나서
빗속을 사람들은 갔었고
비는 사람들을 스몄건만
나는 빗물을 따라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빗물에 스며 간 사람도 비를 피해 간 사람도
아니려 한 채
말없이 실내(室內)의 사정(事情)을 새기면서
비! 빗속에 흔들거리는 세 개의 실내……
내가 8시간의 몸을 팔며 수업을 했던 교실과
소낙비는 피해 가라고 교장이 투덜거렸던 단식 농성하던 미술실,
그리고 비가 오는 오늘도 돌아가야만 할 나의 셋방.
내가 먹고 살 일을 뿌리쳐
이젠 거리를 방황해도
선생님이 왜 쫓겨나야 해요?!
너무 걱정 마라, 언젠가 다시 교단에 설 테니까.
너무 걱정 마라, 그보다 더한 일로도 살아 왔는데.
하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말소리가 흔들거리던
두 개의 실내.
그리고 비, 빗속을 흔들거리는
바람과 슬픔의 사정(事情)마저 지쳐 버린 나,
나는 89.8.29의 비!
그러나 비가 오는 오늘,
마지막 출근을 하고 귀가한 내 눈앞에 떠오른
어느 가을날 어머니가 가꾸시던 나팔꽃 화분 하나!
그 분리된 세월 곁에
구부러진 허리로 밤의 일상(日常)을 진행하는 어머니의 삶을 담은
하나의 실내!
그럼에도 내 곁엔, 내 뒤엔
속절없이
우수 같은 비만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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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8-29 <원작>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1999.09.05. 일월서각,한ᄀᆞᄅᆞᆷ) (원작 원본)
= 2001.07.13. 21:55. 카페 가난한 비_일상 2 (눈 앞에)
― https://cafe.daum.net/poorrain/F1vW/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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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989-08-29. 비 내리는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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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집들과 관련한 해석
「마지막 출근투쟁」은 “비”, “방황”, “우수” 등의 단어 때문에 멜랑콜리한(melancholy) 기분을 줄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멜랑콜리를 표출한 글이 아니다. ‘우수’는 우수(憂愁, 마음이나 분위기가 시름에 싸인 상태. 근심과 걱정.), 우수(雨水, 비가 내려 괸 물 → 전교조 결성을 하여 실직한 삶)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며, 정확하게는 ‘실직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마지막 출근투쟁」은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의 글 「먼 곳 4 ― 수감된 거리에 서면」에서 “나”가 한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먼 곳을 떠날 테지만, 이제 수감된 거리에 서면 나는 불안한 눈, 가는 다리로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실현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글에선 “세 개” → “두 개” → “하나”로 초점이 좁혀지는데, “나팔꽃 화분 하나”는 “어머니”를 표상하는 물건이다. 초점의 이런 이동은 “내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길을 선택했음을 암시한다.
이 글에서 “세 개의 실내” 중 “교실”은 “내가” 실존을 실현할 수 있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간이고, “미술실”은 “내가” 현실 참여를 통해 실존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며, “셋방”은 “내가” 생계를 꾸려가고 기본생활을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먹고살 일을 뿌리쳐” “거리를 방황”하는 실직(해직)교사인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셋방”뿐이어서 길을 걷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는 ‘ 전교조 결성을 하여 실직(해직)한 처지’를 상징하는 말이며, “나팔꽃”은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우수”는 ‘내가 현실에 부딪쳐서 나에게 남게 한 것(실직과 그로 인한 생계의 어려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을 상징한다. 이 글에는 의식의 흐름과 실존주의가 반영되었다. 이 글은 비 내리는 길을 걷는 상황에서 뇌리에 세 개의 실내의 장면이 흐르는, 오버랩 기법을 사용한 무비즘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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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melancholy)
우울 또는 비관주의에 해당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비롯된 이 감정은 이후 정신 의학 분야에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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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해설
비극적 주체의 절망과 희망
― 박석준 시집 『카페, 가난한 비』에 대하여
시인 박석준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 수많은 고통을 겪은 형제들을 두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가족의 일원인 그는 저 자신 또한 전남지역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전교조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잖은 고통을 감내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의 정서적 바탕에는 고통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하지 않고서는 형성되기 어려운 슬프고도 서러운 정서가 깊게 깔려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이때의 슬프고도 서러운 정서는 거개가 침통한 표정,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의 이러한 정서는 심지어 멜랑콜리라고 명명되어도 무방할 정도이다. 멜랑콜리라고 불리는 비정상적인 심리는 그 범주를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 쉽지 않다. 그것이 고독, 소외, 상실, 환멸, 염증, 피곤, 절망, 불안, 초조, 공포, 설움, 우울, 침통, 싫증, 짜증, 권태, 나태, 무료 등 어긋나고 비틀린 정서를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왜곡된 정서는 물론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 부쩍 만연해진 병적 심리 일반과 무관하지 않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소통이 단절된 시대, 공감이 사라진 시대의 정서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멜랑콜리이다.
고독은 소외의 적극적인 모습이거니와, 그것이 과도할 정도로 경쟁을 우위에 두는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물론 이때의 고독은 우울로, 곧 멜랑콜리로 전이되기 쉽다. 멜랑콜리의 핵심 정서는 우울이거니와, 이때의 우울이 고독이나 소외, 상실이나 좌절 등의 정서와 상호 침투되기 쉽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박석준이 자신의 시에서 “비는 전날에도 왔지만/…… 내가 가는 길 위에 우수가 들어선다”(「마지막 출근투쟁」)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다음의 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예이다.
외로움 때문이었다.
댓글 하나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움을 둔 것은
―「음악 카페에서」 부분
한 해면 삼백육십오 일을, 슬프다고 말해 놓고도
말 못할 슬픔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안」 부분
버리고 싶은 우울이 가난이 튀어나온 곳에서 일어난다.
우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울은 네가 없는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와 세 개의 우산과 나」 부분
위의 인용시에는 각 편마다 ‘외로움’, ‘슬픔’, ‘우울’ 등의 어휘가 토로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의 시의 기본 정조가 멜랑콜리라는 이름의 죽음의 정서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고독, 소외, 상실, 환멸, 염증, 피곤, 절망, 불안, 초조, 공포, 슬픔, 설움, 우울, 침통, 싫증, 짜증, 권태, 나태, 무료 등 어긋나고 비틀린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그와 더불어 우수나 우울이 실제로는 심화된 슬픔이나 설움으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라는 것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정서가 자본주의적 근대에 이르러 끊임없이 부추겨진 욕망이 지속적으로 억압되는 데서 기인하는 왜곡된 정서, 병적 정서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은봉 시인, 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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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밖 실화
나는 1989년 8월 29일에 비를 맞고 유동 ‘슬픈 방’으로 돌아와 「마지막 출근투쟁」의 초고를 썼다. 1989년 8월 14일에 직권면직된 ‘먼 곳’ 9인은 본조의 지침에 따라 8월 21일부터 출근투쟁을 했다. 첫날은 내가 작성한 <직권면직을 당한 우리의 입장>을 파고라 언덕에서 발표했다.
8월 29일 출근투쟁에서는,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고 학교에 남은 교사들이 우리를 외면하거나 냉대하거나 피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파고라 언덕의 벤치로 돌아갔는데, 해직교사 9인 모두 월출산에 가서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월출산 계곡에서 투쟁계획을 세우는 중에 비가 왔다. ‘이대로 떠나는 건 너무나 마음 아프니, 아이들에게 떠나는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학교측에 요구해 보자’는 것으로 논의를 마쳤다. 그러고는 광주행 버스를 탄 나는 공용터미널에서 내려 유동 ‘슬픈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를 맞았다. 이 글은 그때까지의 장면을 담고 있다.
우리는 9월 4일에 먼 곳으로 갔다. 9인은 내가 마지막으로 작성한 <더 큰 스승이 되어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라는 유인물 몇십 장씩 가지고 김종대 선생 집에서 학교로 향했다, ― 이 유인물은 내가 먼 곳에 남긴 마지막 글이다. 나는 먼 곳에 근무하면서 신명여상투쟁지지 성명서, 부당징계 거부 성명서, 창립선언문, 수많은 대자보를 썼다.
예상한 대로 학교에서는 한때 조합원이었던 교사들이 우리 9인을 냉대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를 강당으로 모셨고 거기에서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교무실로 가서 짐을 챙기고 떠나려는데 교문을 막은 아이들이 우리를 못 떠나게 하려고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신재용, 안용주 선생이 눈물을 흘렸고 강선 선생과 김종대 선생은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나는 눈시울만 찡했을 뿐 눈물이 나질 않았다. 김성진 선생과 내가 설득한 끝에 1시간 만에 아이들이 우리를 잘 가라고 전송했다. 이 중 서다윗이 나를 업고 아이들 틈을 헤쳐 교문까지 갔으며 거기서 전송을 했다.
그 후 김성진 선생의 집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살아갈 문제를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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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권면직을 당한 우리의 입장
파국의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학원 재단측은 8월 14일자로 전교조 교사들에 대해서 직권면직이라는 만행을 자행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이러한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재단측에 누차에 걸쳐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단측은 정부의 지시대로 우리에게 죽음과 같은 직권면직을 내림으로써 우리를 학교 밖으로 내몰고야 말았다.
…… 중략 ……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우리에게 직권면직을 강요했던 문교부와 그리고 그들의 지시에 충실했던 재단측과의 싸움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문교부와 정권에게는 은폐된 독재의 본질을 끝끝내 보여줄 것이고, 재단측에 대해서는 …… 시민들에게 알릴 것이다. …….
이 땅의 참교육 동지들이여! 이 땅의 민주 시민들이여! 이 땅의 애국 학생들이여! 함께 떨치고 나가자! 위대한 거부*를 통하여 교육 민주화를 완수하자! 이 땅에서 이 시대 우리의 역사적 성업을 완결짓자!
참교육 만세! 전교조 만세! 교육 민주화 만세!
전교조 원년 8월
전교조 먼 곳 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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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거부 : 「먼 곳 2 ― 프리즈 프레임」에 “『위대한 거부』를 읽는 점심시간, 급사 아가씨가 전했다.”라는 표현이 있다. 참조할 것 → 교사가 된 지 한 달 후인 1983년 4월 초인 이날 안기부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안기부에게 각서를 썼다./ 내가 작성한 이 성명서를 파고라 동산에서 발표한 후 우리 9인은 출근투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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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작>= 축소버전
마지막 출근투쟁
― 1989년 8월 29일의 비
비! 빗속에 ……
내가 8시간의 노동을 팔며 수업을 하는 교실,
소낙비는 피해 가라고 투덜거리는 교장의 말을 무시하고
단식 농성하는 미술실,
비가 오는 오늘도 돌아가야만 할 나의 셋방,
흔들거리는 이 세 개의 실내
선생님이 왜 쫓겨나야 해요?!
너무 걱정 마라, 언젠가 다시 교단에 설 테니까.
이보다 더한 일로도 살아왔는데.
아이들과 어머니의 말소리가 흔들거리는 두 개의 실내.
먹고살 일을 뿌리쳐 이젠 내가 거리를 방황해도
비는 전날에도 왔지만
마지막 출근투쟁을 하고 내리는 빗속에서 귀가하는 나,
지난 여름날 빗속에서 어머니가 가꾸던 나팔꽃 화분 하나
내가 가는 길 위에 우수가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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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8-29 (일상 2 ― 89.8.29의 비) <원작>
→ 2012.10.31. 00:43.메.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2년9월22일-1.hwp (3개 행과 2곳에 어휘 많음, 그보다) (개작 초고)
∽ 2013-01-06 오전 6:01.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3년1월5일-2(내가 모퉁이로 사라졌다가).hwp 축소버전 <개작 원본>
= 시집_『카페, 가난한 비』(2013.02.12.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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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989-08-29. 비 내리는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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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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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일상 2 ― 89. 8. 29의 비
장면 같은 오늘,
1989년 8월 29일
비가 내리고
귀가하는 길에서 길 위의 나에게
우수가 들어섰다.
비는 전날에도 왔었건만
세월이 흐를수록 비는
슬픔으로 흘렀던가 싶다.
비, 비가 내리고 있어서
빗속을 사람들은 갔고
비는 사람들을 스몄건만
나는 빗물을 따라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빗물에 스며 간 사람도 비를 피해 간 사람도
아니려 한 체
말없이 실내의 사정事情을 새기면서.
* 실제상황 : 1989-08-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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