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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19), 나의 무비즘 (25) 슬픈 방 1 / 박석준

나의 27 슬픈 방 1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19), 나의 무비즘 (25)

1988-05

박석준 /

슬픈 방 1

 

 

  “안채 사람들이 나갔단다. 무리가 되더라도 우리가

  그 들을 얻어야 할 것 같아야. 형들이 나오면

  식구대로 잠잘 자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885월 중순의 토요일,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자신이 인식한 상황을 예감처럼 털어놨다.

  “얼마랍디여?”라고 나와 헌이 동시에 물었는데, 어머니는

  열 달 사글세로 200만 원인 방값을

  이상한 방정식 같은 계산법을 적용하더니

  당장엔 120만 원만 있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일단 들어가고 봅시다. 이야 구해볼 테니까요.”

  라고 헌이 곧바로 얘기했다.

  나와 헌의 한 달 월급을 합쳐도 40만 원이 더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금액인데.

  “다음주에 월급 나오면 방값으로 해요.”

  란 말에, ·고 검정고시 후 대학생이 된 수는 다만

  “그럼 제 형 생활비는 어떻게 하려고?”라고 표현했다.

 

  5월 말의 토요일, 우리는 두 방으로 이사했다.

  수가 이미 아침부터 짐을 날라다 놓은 터여서

  내가 돌아와서 3면의 책장에 책을 정리했다.

  움푹 들어간 그 방들 역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책 정리를 하려면 불을 켜야 했다.

  “방이 두 개가 되고 본께 넓어서 좋네!”

  저녁에 들른 헌이, 도배도 못 한 방을 둘러보고 말했다.

  하지만, 남의집살이하는 헌은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곧장 순천으로 가야 했다.

  새벽 3시가 되어도 어머니는 을 하고 있었다.

  앞닫이, 30년도 넘게 어머니 곁에 둔, 어머니의 손으로

  장만한 물적 재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 앞에 앉아,

  자신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들, 즉 노트나 사진 등

  형들과 관계된 물건들과, 내가 어렵게 다녔던 고등학교

  모자, 아버지의 사진 등 과거와 관계된 물건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앞닫이 속으로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그만하고 쉬시지 그래요? 그러다,”

  말만을 떨어냈을 뿐, ‘그러다 또 아프시면 어쩌려고……?’

  라는 뒷말은 목구멍 속으로 넣어야 했다.

  “알았다. 앞닫이만 정리해놓고 그만할란다.

  피곤할 텐디 어서 자거라.”

  하여 나는 옆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조금만 누워 있다가 마저 정리를 하겠다던

  수가 피곤했던 듯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는,

  누나 아들 재연이 머리맡에 남겨둔 메모를 보았다.

 

    어느 날 밤. 나와 할머니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원각사 옆 광주은행 사거리에 있었다. 전국에서 온 대학 연합회 학생들과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진 양심수 석방 집회가 열리던 그날, 어김없이 할머니를 따라나선 보호자로서의 어린 나는 그날 집회에서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최루탄 가스를 들이마셔야 했고, 그런 혼란과 긴장감 속에서 할머니는 없는 듯 존재하며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하였다. 어쩌다 한 번씩 두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자리가 나오면, 그렇게 조용한 할머니도 <성 엘모의 열정>과 같은 열정을 토하셨다. 무대에 서서 말보다는 눈으로 호소하였고,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석방을 외쳤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 구호는 양심수를 석방하라!”였는데, 이 구호는 말이 막혔을 때도 외쳤다.

    그렇게 한 번씩 아픈 몸을 이끌고 집회에 나갔다 오면 적어도 보름씩은 앓아누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운동권에서 소문난 김치 맛 때문에, 양심수 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 자리에선 할머니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런 날엔 접시와 그릇과 주방기구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나가셨는데……, 그렇게 해서 또 한 번 앓아눕는다.

 

  벽 쪽으로 등을 기대고 앉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삼형이 소내에서 단식투쟁하다가 고문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췌장염을 앓고 있다는 큰형 소식을 듣고서

  면회 신청을 했지만 좌절됐을 때, 교도소 정문 앞에 누워

  “내 아들 내놓아라! 내 아들을 보기 전에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간다.”농성을 하면서

  면회 요구 투쟁을 하여, 전경들이 끄집어내려고

  달라붙고 했던 어머니! 이 많이 생겨서 그럴까?

  일을 해서 또 아프면, ! 알 수 없다.

  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지만.’

  아침, 어머니의 방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벽에 걸린 둥그런 시계는 10시가 되고 있고

  텔레비전은 조그마한 고리짝 위에 놓인 채

  흐릿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 형, 엄마 방에 전화 놓을 생각 없어?”

  식사를 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수가 제안을 했다.

  “다음 달에는 놉시다.”

  하고 오후, 그 방들을 두고 나는 목포행 버스를 탔다.

  차가 굴러가고, 내 뇌리에 국민학교 6학년

  재연의 메모가 채워졌는데

  어느 결엔가 , 사람, 이 내 머릿속에 어른거리더니

  이내 변하여 어머니 , 전화, 이 새겨져버렸다.

 

 

    * 두 아들: 남민전 사건으로 197911월부터 수감 중인 큰아들 박석률(무기 형)과 셋째아들 박석삼(15년 형)

.

2020-03-21 오전 1:33 <원작 원본>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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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8.05.14.(), 광주시 유동 단칸방 슬픈 방

    1988.05.28. 05.29.(), 광주시 유동 두 개의 슬픈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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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과 관련한 해석

구성 형식기법과 경향

  「슬픈 방 1은 사건들 속에 메모가 삽입된, 그리고 그 메모 속에도 사건들이 흘러가는 독특한 구성 형식을 취한, 시공간을 이동하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펼쳐내는 무비즘의 글이다. 또한 리얼리즘 기법을 사용한,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실존주의 앙가주망 문학의 글이다.

.

소재: “어머니

  「슬픈 방 1은 전반적으로 소재로 내용이 흘러간다. 하지만 의 경우엔 을 중심으로 생각이 진행된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바람(수감된 아들들이 돌아와서 함께 사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시집을 살펴보면 어머니는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나팔꽃 화분 가꾸기도 한다.

  “어머니 두 가지이다. 집에서 하는 일(수감된 자식들을 떠올리며 앞닫이 정리하기 등)과 밖에서 하는 일(수감된 자식들을 위해 하는 일: 집회 참가, 일일찻집 활동, 농성 및 투쟁”)이다. 밖에서는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하거나 혼자서 한다. 시집을 살펴보면 집에서 하는 일엔 나팔꽃 화분 가꾸기, 3면의 책장 닦기 등도 있다.

.

소재 : “

  “에게 ”(생계비 및 생활비. )이며 돈을 버는 을 하기 위해 쉬는 공간이다. 시집 속에 나오는 ”(의 식구)19821월에 집을 잃었고, 이후에 장원여관, 은성여관, 한진여인숙을 거쳐, 19869월에 유동의 월 8만 원 사글세 단칸방 슬픈 방으로 이사했다. 48개월 만에 극히 가난한 사람으로 전락한 신세가 되었다. “는 거처를 옮길 때 을 빌렸다. “나와 헌의 한 달 월급을 합쳐도 40만 원이 더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금액인데.”라는 표현은 두 개의 방으로 이사하기 위해 가 다시 빚을 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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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 사람, 이 내 머릿속에 어른거리더니 이내 변하여 어머니 방, 전화, 이 새겨져버렸다.”라고, 슬픈 방 1 의 지향점의 순서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슬픈 방 1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는 것을 어머니가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하는 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 글은 무비즘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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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엘모의 열정(세인트 엘모의 열정)

  대학동기생 7명이 사횡에 갓 진출하여 고난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성장하는 전형적인 청춘물 영화(원제는 St. Elmo's Fire. 세인트 엘모의 불). 1985년 제작. 무엇보다도 OST가 정말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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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정)_시집

슬픈 방 1

 

 

  “안채 사람들이 나갔단다. 무리가 되더라도 우리가

  그 방들을 얻어야 할 것 같아야. 형들이 나오면

  식구대로 잠잘 자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885월 중순의 토요일,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자신이 인식한 상황을 예감처럼 털어놨다.

  “얼마랍디여?”라고 나와 헌이 동시에 물었는데, 어머니는

  열 달 사글세로 200만 원인 방값을

  이상한 방정식 같은 계산법을 적용하더니

  당장엔 120만 원만 있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일단 들어가고 봅시다. 돈이야 구해볼 테니까요.”

  라고 헌이 곧바로 얘기했다.

  나와 헌의 한 달 월급을 합쳐도 40만 원이 더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금액인데.

  “다음주에 월급 나오면 방값으로 해요.”

  란 말에, ·고 검정고시 후 대학생이 된 수는 다만

  “그럼 제 형 생활비는 어떻게 하려고?”라고 표현했다.

 

  5월 말의 토요일, 우리는 두 방으로 이사했다.

  수가 이미 아침부터 짐을 날라다 놓은 터여서

  내가 돌아와서 3면의 책장에 책을 정리했다.

  움푹 들어간 그 방들 역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책 정리를 하려면 불을 켜야 했다.

  “방이 두 개가 되고 본께 넓어서 좋네!”

  저녁에 들른 헌이, 도배도 못 한 방을 둘러보고 말했다.

  하지만, 남의집살이하는 헌은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곧장 순천으로 가야 했다.

  새벽 3가 되어도 어머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앞닫이, 30년도 넘게 어머니 곁에 둔, 어머니의 손으로

  장만한 물적 재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 앞에 앉아,

  자신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들, 즉 노트나 사진 등

  형들과 관계된 물건들과, 내가 어렵게 다녔던 고등학교

  모자, 아버지의 사진 등 과거와 관계된 물건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앞닫이 속으로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만하고 쉬시지 그래요? 그러다,”

  말만을 떨어냈을 뿐, ‘그러다 또 아프시면 어쩌려고……?’

  라는 뒷말은 목구멍 속으로 넣어야 했다.

  “알았다. 앞닫이만 정리해놓고 그만할란다.

  피곤할 텐디 어서 자거라.”

  하여 나는 옆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조금만 누워 있다가 마저 정리를 하겠다던

  수가 피곤했던 듯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는,

  누나 아들 재연이 머리맡에 남겨둔 메모를 보았다.

 

    어느 날 밤. 나와 할머니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원각사 옆 광주은행 사거리에 있었다. 전국에서 온 대학 연합회 학생들과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진 양심수 석방 집회가 열리던 그날, 어김없이 할머니를 따라나선 보호자로서의 어린 나는 그날 집회에서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최루탄 가스를 들이마셔야 했고, 그런 혼란과 긴장감 속에서 할머니는 없는 듯 존재하며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하였다. 어쩌다 한 번씩 두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자리가 나오면, 그렇게 조용한 할머니도 <성 엘모의 열정>과 같은 열정을 토하셨다. 무대에 서서 말보다는 눈으로 호소하였고,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석방을 외쳤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 구호는 양심수를 석방하라!”였는데, 이 구호는 말이 막혔을 때도 외쳤다.

    그렇게 한 번씩 아픈 몸을 이끌고 집회에 나갔다 오면 적어도 보름씩은 앓아누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운동권에서 소문난 김치 맛 때문에, 양심수 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 자리에선 할머니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런 날엔 접시와 그릇과 주방기구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나가셨는데……, 그렇게 해서 또 한 번 앓아눕는다.

 

  벽 쪽으로 등을 기대고 앉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삼형이 소내에서 단식투쟁하다가 고문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췌장염을 앓고 있다는 큰형 소식을 듣고서

  면회 신청을 했지만 좌절됐을 때, 교도소 정문 앞에 누워

  “내 아들 내놓아라! 내 아들을 보기 전에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간다.”고 농성을 하면서

  면회 요구 투쟁을 하여, 전경들이 끄집어내려고

  달라붙고 했던 어머니! 할 일이 많이 생겨서 그럴까?

  일을 해서 또 아프면, ! 알 수 없다.

  일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지만.’

  아침, 어머니의 방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벽에 걸린 둥그런 시계는 10가 되고 있고

  텔레비전은 조그마한 고리짝 위에 놓인 채

  흐릿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 형, 엄마 방에 전화 놓을 생각 없어?”

  식사를 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수가 제안을 했다.

  “다음 달에는 놉시다.”

  하고 오후, 그 방들을 두고 나는 목포행 버스를 탔다.

  차가 굴러가고, 내 뇌리에 국민학교 6학년

  재연의 메모가 채워졌는데

  어느 결엔가 , 사람, 이 내 머릿속에 어른거리더니

  이내 변하여 어머니 방, 전화, 이 새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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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18:01. 박석준시집_시간의색깔은자신이지향하는빛깔로간다_내지(0514).pdf (빨간색 //은 편집자가 임의 오교정하여 들여쓰기 안 함)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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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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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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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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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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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유동 슬픈 방 근처 (골목 뒤편에 슬픈 방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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