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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17), 나의 무비즘 (23) 먼 곳 3 ―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 박석준

나의 25 먼 곳 3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17), 나의 무비즘 (23)

1986-0912 / 1987-03 / 1987-11

박석준 /

먼 곳 3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

.

  11월에 형이 체포됐다. 상실, 결여, 나의 고독, 카오스적 나가 5·18을 흘러가고, 김제영이 다가와 함께 본 백장미*.

  스물다섯 살 1월에 우리 집을 잃어, 여관방으로 이사했다.

  졸업하여 스물여섯, 2월 말인 오늘 다시 구직하러 다닌 후, 나는 슬퍼졌다. 나는 왜 가벼운 것일까?

  무기수인 형, 장미의 곁에 두 얼굴! 산다는 건 무엇일까?

 

    *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백장미, Die Weisse Rose).

박석준, 장미의 곁에 있는 두 얼굴에서

.

(원작 교정)_시집

먼 곳 3

  ―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세월은 여관방에서 여인숙을 거쳐 단칸방으로 갔다.

  내 두 달 월급만큼의 돈을 빌려 돈을 내고,

  추석날 짐을 싸, 열 달을 빌려 쓰는 단칸방으로 일요일에

  다섯 식구가 이사했다. 창 없는 어두운 좁은 방,

  두 사람이 벽에 기대야 다섯이 자는 유동 슬픈 방,

  그 방에서 헌이 시월 초순에 떠났다. 순천으로 갔다.

  그 후 곧 어머니가 누나랑 동지죽 장사를 시작했다.

  “뭘 이렇게 많이?…… 손님도 다 먹지 못할걸.”

  “그래도 그런 것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죽 한 그릇

  사 먹을 형편이라면 얼마나 배고픈 사람이겄냐?”

  11월 말의 토요일, 찾아간 나에게 말했으나 어머니는

  신우염이 도져 12월 초순에 장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다음해인 올해. 3월에 잘생긴 고1 아이가 싱글거렸다.

  ‘쟤가 수업을 하는 거냐, 나를 감상하는 거냐?’

  생각케 한 그 애가 광주로 귀가하려고 길을 걷는 나를

  따라왔다. 엿새를 버스정류장까지 오더니, 마지막 날엔

  “하숙하면 더 편하잖아요?” 하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3월 봉급으로 4월에 항구도시에 자취방을 빌려,

  밤엔 을 설계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우면

  누워 신음하는 어머니, 대비하고 곁에 있는 수, 조카애,

  밤의 광주 유동 슬픈 방 들이 뇌리를 쉬 떠나지 않았다.

 

  어떤 고1 아이들이 6월항쟁 7, 친절하게 다가왔다.

  “뼈만 남아 온몸이 너무 가늘한 그런 몸으로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었을까? 수상해요.” 말을 하여,

  왜 양복을 벗고 반팔 와이셔츠 차림으로 판서했을까?

  “네가 생각하는 만큼만 나는 너에게 남을 것이다.”

  반응하게 하거나, 왜 우리를 때리지 않으세요? 묻거나,

  저는 머리가 나쁘니까 머리에 두 대 때려주세요.

  뚱뚱한 애가 요구하거나, 아빠!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그러나 광주에서 새벽 버스를 탄, 먼 곳에 온 나에겐

  아프다! 아프니까 어쩌란 말이냐?

  아픔도 수감 중에 감수해야 할 일 아닐까?

  도대체 큰형*이 얼마나 아프기에? 탄원서를 쓰라고

  작은형은 말하는가? 어머니가 아파서 신음하는데…….

  11월 끝 금요일 오후의 교무실에서 생각이 흘렀다.

  어스름에 나팔꽃 화분 앞에 움츠려 있는 어머니 얼굴,

  형들의 준수한 얼굴, 얼굴들이 생각 사이로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기본만 남은 몸 나는,

  아프다는 걸 학교에서 모르게 여기까지 왔는데,

  갇혀 있다, 괴롭다, 불안하다, 불편하다.

  싫다! 나의 상태가 싫어! 나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나는 소변이라도 보러 가자.’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후두둑 소리, 11월 같은 빗줄기가 급하게 시야를

  파고들 뿐, 나는 갇혀버렸다. 곧 시작종이 울릴 것 같아

  가랑이를 무릎 아래까지 접쳐 올리고, 첨벙첨벙 소리들.

  “선생님 다리가 제 팔뚝보다 가늘어요. 아프지 마세요.

  제가 업을게요.” 뚱뚱한 그 아이의 소리에

  등에 업혀 아이의 찢어지고 구멍 난 우산으로

  빗물, 우수를 꽤 가렸다. 그렇게 빗물과 부딪치고 나는,

  형이 나를 살려냈는데, 탄원서를 써야겠다. 생각을 한다.

  나 때문에 갇혀버린 나! 나도 가야 하는데…….

 

 

    * 큰형 : 박석률(19472017).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197811월에 체포되어 무기수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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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4 2020.04.23. 14:28 (사먹/팔와이셔츠/려 주세요/혀 버렸다/혀 버) <원작 원본>

2020.04.27. 11:08. 박석준시집_시간의색깔은자신이지향하는..._내지(20.04.27).pdf (사 먹/팔 와이셔츠/려주세요/혀버렸다/혀버) (원작 띄어쓰기 교정본)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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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원고> 2020.04.23. (사먹/팔와이셔츠/려 주세요/혀 버렸다/혀 버)

먼 곳 3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세월은 여관방에서 여인숙을 거쳐 단칸방으로 갔다.

  내 두 달 월급만큼의 돈을 빌려 돈을 내고,

  추석날 짐을 싸, 열 달을 빌려 쓰는 단칸방으로 일요일에

  다섯 식구가 이사했다. 창 없는 어두운 좁은 방,

  두 사람이 벽에 기대야 다섯이 자는 유동 슬픈 방,

  그 방에서 헌이 시월 초순에 떠났다. 순천으로 갔다.

  그 후 곧 어머니가 누나랑 동지죽 장사를 시작했다.

  “뭘 이렇게 많이? …… 손님도 다 먹지 못할걸.”

  “그래도 그런 것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죽 한 그릇

  사먹을 형편이라면 얼마나 배고픈 사람이겄냐?”

  11월 말의 토요일, 찾아간 나에게 말했으나 어머니는

  신우염이 도져 12월 초순에 장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다음해인 올해. 3월에 잘생긴 고1 아이가 싱글거렸다.

  ‘쟤가 수업을 하는 거냐, 나를 감상하는 거냐?’

  생각게 한 그 애가 광주로 귀가하려고 길을 걷는 나를

  따라왔다. 엿새를 버스정류장까지 오더니, 마지막 날엔

  “하숙하면 더 편하잖아요?” 하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3월 봉급으로 4월에 항구도시에 자취방을 빌려,

  밤엔 일을 설계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우

  누워 신음하는 어머니, 대비하고 곁에 있는 수, 조카애,

  밤의 광주 유동 슬픈 방 들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떤 고1 아이들이 6월항쟁 후 7, 친절하게 다가왔다.

  “뼈만 남아 온몸이 너무 가늘한 그런 몸으로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었을까? 수상해요.” 말을 하여,

  왜 양복을 벗고 반팔와이셔츠 차림으로 판서했을까?

  “네가 생각하는 만큼만 나는 너에게 남을 것이다.”

  반응하게 하거나, 왜 우리를 때리지 않으세요? 묻거나,

  저는 머리가 나쁘니까 머리에 두 대 때려 주세요.

  뚱뚱한 애가 요구하거나, 아빠!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그러나 광주에서 새벽 버스를 탄, 먼 곳에 온 나에겐

  아프다! 아프니까 어쩌란 말이냐?

  아픔도 수감 중에 감수해야 할 일 아닐까?

  도대체 큰형이 얼마나 아프기에? 탄원서를 쓰라고

  작은형은 말하는가? 어머니가 아파서 신음하는데…….

  11월 끝 금요일 오후의 교무실에서 생각이 흘렀다.

  어스름에 나팔꽃 화분 앞에 움츠려 있는 어머니 얼굴,

  형들의 준수한 얼굴, 얼굴들이 생각 사이로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기본만 남은 몸 나는,

  아프다는 걸 학교에서 모르게 여기까지 왔는데,

  갇혀 있다, 괴롭다, 불안하다, 불편하다.

  싫다! 나의 상태가 싫어! 나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나는 소변이라도 보러 가자.’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후두둑 소리, 11월 같은 빗줄기가 급하게 시야를

  파고들 뿐, 나는 갇혀 버렸다. 곧 시작종이 울릴 것 같아

  가랑이를 무릎 아래까지 접쳐 올리고, 첨벙첨벙 소리들.

  “선생님 다리가 제 팔뚝보다 가늘어요. 아프지 마세요.

  제가 업을게요.” 뚱뚱한 그 아이의 소리에

  등에 업혀 아이의 찢어지고 구멍 난 우산으로

  빗물, 우수를 꽤 가렸다. 그렇게 빗물과 부딪치고 나는,

  형이 나를 살려냈는데, 탄원서를 써야겠다. 생각을 한다.

  나 때문에 갇혀 버린 나! 나도 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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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4 2020-03-16 오전 9:40 (누우 뇌리를/ 이 쉬) (초고)

= 2020.03.17. 16:43.내메. 박석준-3시집-0618-12-105()-5-2.hwp (초고 원본)

+ 2020.04.23. 14:28.. 저자문의-.hwp (누우/ 뇌리를 ) = <원작>

= 2020.04.23. 18:45.. 2020_04(박석준)원고-교정본-1.hwp <원자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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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6.09.18.(, 추석),

    1986.09.21.(, 이사),

    1986.1112 : 1

    1987.031987.04,

    1987.07.10.(6월항쟁) 이후,

    1987.11.26.(, 어머니 입원)

    1987.11.27.(, 목포 비 29.5mm,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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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과 관련한 해석

  자서전적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에서 에게는 다음의 사정이 흘러간다.

  “의 큰형이 197911월에 체포되어 무기수가 되었고, “나의 고독, 카오스적 나가 5·18을 흘러가고, 김제영이 다가와 함께” “백장미(저항운동)”를 보았고 스물다섯 살(1982) 1월에 우리 집을 잃어, 여관방으로 이사했다.” “스물여섯, 2월 말인 오늘 다시 구직하러 다닌 후, 나는 슬퍼졌다. 나는 왜 가벼운 것일까?” (장미의 곁에 있는 두 얼굴)

  “(1984) 9월 말 일요일, 우리는 (장원)여관에서 (은성여관으로) 떠나야 했다, 집세를 밀릴 정도로 2월부터 적자가 심해서.” (아버지 무너진 집)

  “한진여인숙으로 옮겨가야 했을 때, 옮겨가고 난 뒤에, 내 뇌리에는 돈과 사람과 삶이라는 단어들이 수도 없이 교차되었다.” (어머니 돈과 사람과 방)

  “생계비로 돈이 떨어지고, 큰형이 아프다 하여 영치금을 빚냈는데, 또 돈을 빌려야 될 것 같아서 12월 첫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된 후에, 2층 회의실에서 평교사회 창립대회를 진행하는 어스름 길에서, 서른을 거의 지나간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먼 곳을 떠날 테지만, 이제 수감된 거리에 서면 나는 불안한 눈, 가는 다리로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 (먼 곳 4 수감된 거리에 서면)

  시집을 통해서 먼 곳 3 11월의 얼굴들과 빗물유동 슬픈 방으로 이사한 때가 1986(29) 9월이며, 식구들이 19821월에 계림동 집을 잃고 48개월이 흘러간 후에 돈 한푼도 없는 신세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슬픈 방에서 슬픈가난한 사람의 흔들거리며 허덕이는 삶에서 일어나는 슬픔뿐만 아니라 기대하는, 극복하려는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먼 곳 3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극히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와 아이들 간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아픈 가 아픈 어머니, (민주화운동을 했으나) 수감자인 아픈 큰형의 사정으로 괴로워하는, 3개의 아픔들이 충돌하는 ― ⓐ, , 3가지 사정이 시공간을 이동하면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무비즘 경향의 글이다.

  “가 괴로워하는데 수감 중에 감수하고 말이 뇌리에서 굴러갔다. “그런데 나는? 기본만 남은 몸 나는, 아프다는 걸 학교에서 모르게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 후 반작용으로 수감 중에 감수말이 연상된 것이다. 내가 병든 몸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알게 되면 는 처지가 곤란해지니까. 안기부에게 각서를 썼기 때문에 내가 병든 몸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알게 되면 나는 학교를 떠나야 하는 처지에 있고(먼 곳 2), 큰형은 췌장염을 앓고 있다.(슬픈 방 1)

  이 글은 서사를 하다가 갑자기 그런데 나는? 싫다!라는 의식의 흐름이 나타나 흐름을 긴장시킨다. 의식의 흐름빗물업혀로 이어지는 복선 역할을 한다.

  이 글에서 화자, 세 사람(큰형, 어머니, )의 아픔이 진행 중인데 무엇을 1차적으로 해결(선택)해야 하는가로 괴로워한다(실존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의 등에 업혀 아이의 찢어지고 구멍 난 우산으로 빗물, 우수를 꽤 가렸다. 그렇게 빗물과 부딪치고 나는” “형이 나를 살려냈는데, 탄원서를 써야겠다. 생각을 한다.로 마음을 정리한다. (이 부분의 해석엔 콘텍스트가 필요하다. 시집의 첫 글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쓰러지는 나를 큰형이 업어 서울 병원으로 데려가 살려낸 이야기가 있다.)

  “등에 업혀 타인의 배려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에겐 나 때문에 갇혀버린 나! 나도 가야 하는데…….”라고 실존의 문제(의지)그대로 남는다. 빗물우수(雨水, 憂愁)” 실존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나 때문에 갇혀버린 나!수감중인 형과 연결되어 부조리와 아우라를 분출한다.

  “소변11월 같은 빗줄기는 하강하는 동적, 시각적 이미지를 일으키지만 그 양상이 다르다. “11흐르는 눈물의 심상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연결되는 시간 속 현상으로 나타나서 아이로니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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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주망(參與文學 Engagement literature)

  참여문학은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통해 문학론으로 확립됐다. 앙가주망은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자기 구속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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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밖 실화

  198510월에 서클(전남대 휴머니스트회) 후배 박오철의 진화를 받은 후에 나는 금남로 도청 앞 YMCA로 가서 사회서클(Y독서회)을 주도하는 김상집 형을 만났다. 이 서클에서 우리 서클 회원인 김제영, 박오철이 이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11월부터 활동을 했다. 1986이 시작된 후엔 서클의 커리큘럼을 짜는 등 역할을 맡았는데, 5월에 우연히(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장주섭을 그 건물에서 만났고 그의 권유로 따라간 곳에서 교육민주화선언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주섭은 함께 일하자고 했지만 나는 맡은 일이 있어서 못 한다 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나와 제영, 오철은 이제 현장에서 교육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19871월까지 활동하고 떠나겠다고 상집 형에게 말했다.

  19872월에 김종훈이란 사람이 장주섭한테서 말을 들었다, 먼 곳 근무할 거라고 전화로 전했다.

 

  두 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한 헌과 국민학교를 졸업한 막내 수가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어머니가 198610월부터 백운동에서 동지죽 장사를 하였는데(결국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장사=직업이 되고 말았는데), 나는 198611말의 토요일에 처음으로 장사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식사 후엔 Y독서회로 갔다.

  나의 월급은 40만 원 정도였고 집안 형편이 매우 안 좋았지만, 다음해(1987) 3월 중순에 어머니에게 말했다. “목포에 가서 운동을 해야겠어요. 그러러면 거기서 살아야 하니까 3월 봉급은 쓰지 마세요.” 4월에 선불로 25만 원을 주고 목포포 가톨릭회관 뒤편에 월세 5만 원 자취방을 구하게 된 것은 싱글거렸그 애(박재원 열사)’의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김종훈 선생의 옆방에서 자취를 하였고 목포에서 6월항쟁에 참가했다.

  ‘그 애는 나를 따라온 이유가 선생님이 잘생겨서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 손목을 잡고는 잘 생겼는데 너무 마르셨어요. 하숙하면 더 편하잖아요?”라고 덧붙였다. 다른 사람이(특히 학생이) 나를 필요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에 나의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이것이 먼 곳에서의 나의 살아가는 형태를 바꾸는 길을 열었다. 나는 밤에 자취방에서 교육운동에 관련된 을 설계하게 되었다. 퇴근하여 내가 목포 교육운동모임 회의에 참석하러 가면 그 후 돌아올 때까지 이 자취방으로 주빈 등 아이들이 찾아와 학습이나 토론을 하였다. 6월항쟁 기간에는 아이들이 항쟁하고 이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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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항쟁이 끝나고, 7월의 셋째 주에 그 애가 내 뒤를 밟았다. 내 자취방에서

  “그래도 화염병까지 던지며 데모하는 건 폭력적인 것 아니에요?”

  “그렇지만 사실을 올바로 파악해야 하지 않겠냐?!”

  “선생님은 말하는 것이 우리들한테 데모하라고 세뇌하는 것 같아요.”

  “내가 너한테 세뇌를 해? , 그런 식으로 나를 생각해 가고 싶거든 당장 집에 가 버려! 그리고 니가 나에 대해서 뭔가 달리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찾아오지도 말어!”

  말들이 흘러갔다. 그날 밤에 나는 후회했다.

  화요일인 91일에 그 애가 자취방에 찾아왔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화를 안 내고도 말할 수는 있었던 건데. 화를 낸 일은 정말 미안하다.”

  9월 하순에 먼 곳에서 비교고사를 거부하는 1학년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그리고 10월 하순에 그 애가 대호, 창석을 내 자취방으로 데려와 1학년인 학습 모임을 꾸렸다. 이후 아이들은 이 자취방을 학습 토론의 방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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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0-03-16

먼 곳 3 11월의 얼굴들과 빗물

 

 

  세월은 여관방에서 여인숙을 거쳐 단칸방으로 갔다.

  내 두 달 월급만큼의 돈을 빌려 돈을 내고,

  추석날 짐을 싸, 열 달을 빌려 쓰는 단칸방으로 일요일에

  다섯 식구가 이사했다. 창 없는 어두운 좁은 방,

  두 사람이 벽에 기대야 다섯이 자는 유동 슬픈 방,

  그 방에서 헌이 시월 초순에 떠났다. 순천으로 갔다.

  그 후 곧 어머니가 누나랑 동지죽 장사를 시작했다.

  “뭘 이렇게 많이? …… 손님도 다 먹지 못할걸.”

  “그래도 그런 것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죽 한 그릇

  사먹을 형편이라면 얼마나 배고픈 사람이겄냐?”

  11월 말의 토요일, 찾아간 나에게 말했으나 어머니는

  신우염이 도져 12월 초순에 장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다음해인 올해. 3월에 잘생긴 고1 아이가 싱글거렸다.

  ‘쟤가 수업을 하는 거냐, 나를 감상하는 거냐?’

  생각게 한 그 애가 광주로 귀가하려고 길을 걷는 나를

  따라왔다. 엿새를 버스정류장까지 오더니, 마지막 날엔

  “하숙하면 더 편하잖아요?” 하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3월 봉급으로 4월에 항구도시에 자취방을 빌려,

  밤엔 일을 설계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우면 뇌리를

  누워 신음하는 어머니, 대비하고 곁에 있는 수, 조카애,

  밤의 광주 유동 슬픈 방 들이 쉬 떠나지 않았다.

 

  어떤 고1 아이들이 6월항쟁 후 7, 친절하게 다가왔다.

  “뼈만 남아 온몸이 너무 가늘한 그런 몸으로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었을까? 수상해요.” 말을 하여,

  왜 양복을 벗고 반팔와이셔츠 차림으로 판서했을까?

  “네가 생각하는 만큼만 나는 너에게 남을 것이다.”

  반응하게 하거나, 왜 우리를 때리지 않으세요? 묻거나,

  저는 머리가 나쁘니까 머리에 두 대 때려 주세요.

  뚱뚱한 애가 요구하거나, 아빠!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그러나 광주에서 새벽 버스를 탄, 먼 곳에 온 나에겐

  아프다! 아프니까 어쩌란 말이냐?

  아픔도 수감 중에 감수해야 할 일 아닐까?

  도대체 큰형이 얼마나 아프기에? 탄원서를 쓰라고

  작은형은 말하는가? 어머니가 아파서 신음하는데…….

  11월 끝 금요일 오후의 교무실에서 생각이 흘렀다.

  어스름에 나팔꽃 화분 앞에 움츠려 있는 어머니 얼굴,

  형들의 준수한 얼굴, 얼굴들이 생각 사이로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기본만 남은 몸 나는,

  아프다는 걸 학교에서 모르게 여기까지 왔는데,

  갇혀 있다, 괴롭다, 불안하다, 불편하다.

  싫다! 나의 상태가 싫어! 나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나는 소변이라도 보러 가자.’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후두둑 소리, 11월 같은 빗줄기가 급하게 시야를

  파고들 뿐, 나는 갇혀 버렸다. 곧 시작종이 울릴 것 같아

  가랑이를 무릎 아래까지 접쳐 올리고, 첨벙첨벙 소리들.

  “선생님 다리가 제 팔뚝보다 가늘어요. 아프지 마세요.

  제가 업을게요.” 뚱뚱한 그 아이의 소리에

  등에 업혀 아이의 찢어지고 구멍 난 우산으로

  빗물, 우수를 꽤 가렸다. 그렇게 빗물과 부딪치고 나는,

  형이 나를 살려냈는데, 탄원서를 써야겠다. 생각을 한다.

  나 때문에 갇혀 버린 나! 나도 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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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6-20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메모)

2019-11-24 2020-03-04 2020-03-16 오전 9:40 (초고)

= 2020.03.17. 16:43.내메. 박석준-3시집-0618-12-105()-5-2.hwp (초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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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재용_나(박석준)_김종훈_1987-10_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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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전경_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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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 3호광장(내가 자취한 곳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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