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24 어머니 ― 돈과 사람과 방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15)
1986-05
박석준 /
어머니
― 돈과 사람과 방
한진여인숙으로 옮겨가야 했을 때, 옮겨가고 난 뒤에,
내 뇌리에는 ‘돈과 사람과 삶’이라는 단어들이 수도 없이 교차되었다. 다시 3백만 원을 빌려 식구들이 거처를 옮긴 것뿐이지만 그래서 나는 슬펐다. 어머니가 이 여인숙 방들을, 혹시 형들이 나온다면 거처로 삼아도 좋을 만한 곳이라고 희망처로 생각한 듯도 싶은데, 나는 현실에 날로 슬픔만 짙게 느껴갔을 뿐이었다. 3백만 원, 그게 우리 식구들에게 목돈으로 남겨진 돈의 전부라는 걸 의식해야만 했다. 그것도 빚을 낸 돈이라는 것을…….
‘ 나는 이제는 수업을 해야만 하는, 근무를 해야만 하는, 아니, 몸을 팔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받는 돈이 나의 상품가치이자 몸값이며, 우리 식구들의 생계에 충당되어야 할 돈으로 해석될 터이지만, 나는 내 가슴에 흐르는 말을 형들에게 전할 수가 없다. 형들은 감옥에 갇혀 있고, 남은 우리들은 돈과 사람과 삶 때문에 여인숙에 갇혀 있으니까. 그리고 형들은 교도소에 있고, 나는 교직에 있고, 남은 식구들은 여인숙에 있으니까.’
하지만 삶이 말없이 교차되어갔어도, 내가 몸을 팔아서 체중이 줄어도, 몸을 팔고 나면 스물아홉 살 나는 어김없이 여인숙–사람을 숙박시키는 일을 업으로 하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음 날에도 몸을 팔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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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_『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1999.06.20./1999.09.05. 백산서당/일월서각/ᄒᆞᆫᄀᆞᄅᆞᆷ) <원작 원본>
∼ 2020.04.13. 11:58 (29살) <개작 원본>
→ (스물아홉 살)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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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Mamma)
― 돈과 사람과 방
한진여인숙으로 옮겨가야 했을 때, 그리고 옮겨가고 난 뒤에, 내 머릿속에는 ‘돈과 사람과 삶’이라는 언어들이 수도 없이 뒤범벅되고 교차되어 갔다. 다시 3백만 원을 빌려 식구들이 거처를 옮기고 만 것뿐이지만, 그래서 나는 슬펐다. 어머니는 그러한 여인숙 방들을, 그래도 혹시 형들이 당장에라도 나온다면 거처로 삼아도 좋을 만한 곳이라고, 일말의 희망처로 생각한 듯도 싶은데, 나는 그러한 현실에 날로 슬픔만 짙게 느껴 갔을 뿐이었다. 3백만 원, 그게 우리 식구들에게 목돈으로 남겨진 돈의 전부라는 걸 의식해야만 했다. 그것도 빚을 낸 돈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는 수업을 해야만 하는, 근무를 해야만 하는―아니, 몸을 팔아야만 하는―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받는 돈이 나의 상품가치이자 몸값이며, 우리 식구들의 생계에 충당되어야 할 돈으로 해석될 터이지만. 나는 그럼에도 내 가슴에 흐르는 말을 형들에게 전할 수가 없다. 형들은 감옥에 갇혀 있고, 남은 우리들은 돈과 사람과 삶 때문에 집에 갇혀 있으니까. 그리고 형들은 교도소(矯導所)에 있고, 나는 교직(敎職)에 있고, 남은 식구들은 여인숙(旅人宿)에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듯 삶이 언어들로 뒤범벅되어 교차되어 갔어도, 나는 몸을 팔고 나면 어김없이 여인숙–사람을 숙박시키는 일을 업으로 하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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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_『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1999.06.20./1999.09.05. 백산서당/일월서각/ᄒᆞᆫᄀᆞᄅᆞᆷ) <원작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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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6년 5월에서 1986년 6월까지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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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집과 관련한 해석
우리 식구들은 집을 잃고 털고 남은 돈으로 1982년 1월에 작은 장원여관에 세를 들어 살았다. 나는 1983년에 교사가 되어서 번 돈으로 식구의 생계에 충당하였지만, 신용금고에서 600만 원을 빌려 1984년 9월에 식구는 더 작은 여관인 은성여관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러곤 20개월이 지난 후 1986년 5월에 “다시 3백만 원을 빌려” 한진여인숙으로 옮겨갔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1986년 6월 어느 날까지, 실제로 일어난 일과 29살 교사인 나에게 일어난 생각들을 시 형식으로 쓴 것이다.
「어머니」는 부제가 “돈과 사람과 방”인데, 글 속에선 “돈과 사람과 삶”이란 말로 대체되어 있다. 내가 어른이 된 후에 “방”은 나의 “삶”을 얽어버렸기 때문이다.
도시의 많은 소시민은 “돈”을 풍요롭게 사는 통로로 생각하여 돈을 벌고 모으지만, 나는 “돈”으로 “거처를 옮긴 것뿐이”어서 슬펐다.
‘돈 많은 사람’이 ‘방(= 집)’을 풍요로운 삶을 위한 기본 장소로 사용한다는 건 마땅한 일이지만, 그 중엔 ‘방(= 집)’을 욕망(부의 축적) 실현의 통로로 사용한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가난한 내가 문제 삼아야 되는지,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그만이지 왜 남의 많은 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따위의 생각이 한국 자본주의라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서 들곤 했다.
「어머니」는 ‘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방’으로 대신하고 있다. 나는 도시의 많은 (일반적인) 가난한 소시민과는 ‘다른 가난한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세 가지 형태의 ‘방’이 나를 얽고 있기 때문이다. ‘감방’과 ‘여인숙 방’과 ‘교실: 유치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교육 기관에서, 학생들이 수업하는 방’이 나를 얽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은 내가 돈을 벌어올 수 있는 통로이고, ‘여인숙 방’은 내가 생계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 공간이고, “교도소 = 감옥(감방)”은 내가 번 돈이 쓰여질 곳이다. ― 이런 면에서 나는 (일반적인) 가난한 소시민과는 ‘다른 가난한 소시민’이다.
나는 ‘방’을 “목돈”으로 구했지만 그 돈은 나의 돈이 아니라 “빚을 낸 돈”이다. 교실에서 내가 번 돈은 “나의 상품가치이자 몸값이며”, “우리 식구들의 생계에 충당되어야 할 돈으로 해석”된다. 내가 몸에 이상이 생겨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면 ‘돈’은 나를 떠날 것이며 나는 ‘방’을 더 작은 방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것이 나의 ‘돈과 사람과 삶’을 흔들거리게 하는 조건이다.
나에겐 돌아가야 할 곳이 “여인숙: 규모가 작고 값이 싼(적은 돈을 받는) 여관. 사람을 숙박시키는 일을 업으로 하는 집”이다. 즉 나는 ‘교실에서 번 돈’으로 ‘돈을 받는 집 = 여인숙’으로 돌아가야 하고 ‘교실에서 번 돈’을 ‘돈이 들어가야 할 집 = 교도소, 감옥(감방)’에 넣어주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어머니의 지향(바람)이며 “어머니” 의 삶에 충당해줄 나의 삶의 형태이다. 다시 말해 “나”는 “어머니”와 같은 일을 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요소로 인해 「어머니 ― 돈과 사람과 방」에 알레고리가 발생한다.
“어머니가 이 여인숙 방들을, 혹시 형들이 나온다면 거처로 삼아도 좋을 만한 곳이라고 희망처로 생각한 듯도 싶은데, 나는 현실에 날로 슬픔만 짙게 느껴갔을 뿐이었다.”
“나”의 “슬픔”이 어머니의 슬픔이며 “어머니”의 “희망”이 나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의 희망처이든 아니든 간에, “다음 날에도 몸을 팔아야 하”고 그러려면 “어김없이” 돌아가야 할 “방 = 여인숙”이 필요하니까.
「어머니」에서의 “삶”은 “나”의 ‘실존’을 의미하면서, 현실에서 살아가는 “나”에겐 ‘사는 일. 또는 살아 있음.’으로 변해버리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말이다. 이 글엔 실존주의(Existentialisme)가 반영되어 있다. “나는 내 가슴에 흐르는 말을 형들에게 전할 수가 없다.”에서의 “말”은 무엇일까? ― 인간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미칠 듯한 명징에의 요구와 이 불합리한 세계의 충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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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實存主義)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사상). 인간이 개성을 잃고 평균화·기계화·집단화되는 소외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실존의 구조를 인식·해명하려고 하는 철학사상과 문예사조. 쇠렌 키르케고르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보통 학자들은 마르틴 하이데거를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본다.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not merely the thinking subject),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master)이다. 19세기 중엽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프로이센 출신의 철학자 니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실존(existence)’은 원래 이념적인 본질(Essence)과 대비하여 상용되는 철학용어로서 ‘밖에’ ‘서 있는(Sistere)’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은 첫째로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현실 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지금, 여기’를 사는, 이 현실의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실존’은 둘째로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존재방식을 현실의 생존방식을 통해 실현해 가는 자각적 존재(自覺的存在)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자각적 존재는 모두 이미 지정되어 있는 본질에 따라서 그 현실의 존재방식이 결정되는 것에 반하여, 자각적 존재인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므로 현재의, 이 현실의, 자기의 생존 방식에 의해서 인간 독자의 본질 ― 그 인간을 그 인간답게 하는 개성 ― 이 시시각각으로 새겨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실존이 그 본질을 결정하고, 실존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자각적 자기가 진실한 ‘실존’이라는 이름에 맞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 이전의 ‘관념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선택의 필연성을 스스로 인수하는 ‘실존적’ 자유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가 무력하며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러한 기존(旣存)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다’고 하는 무한의 자기초극(自己超克)과 자기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진실한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기성관념이 나타내는 형식적 보편성을 돌파하고 유한한 단독적 자기의 입장으로 되돌아와 거기서부터 재출발함으로써, 현존하는 자기의 유한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탈자적(脫自的)인 자기초월의 결단이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결단을 바탕으로 비로소 구체적인 진리도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무한한 자기초극의 노력으로써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려 하고, 이러한 자기의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근원적 진리라고 하는 실존철학의 주장은 추상적 관념이나 객관적 제도나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어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경종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존철학은 모든 도그마의 절대화 경향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킴으로써 현대 휴머니즘 철학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중우적(衆愚的)인 당파성에 의존해서 안이한 수면을 즐기려 하는 자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의 필요성과 책임감을 각성시키는 부단한 문제 제기자로서 실존주의는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며,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강조만으로는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향의 명확화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상식이나 과학과의 적극적인 결합이 요구된다.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등을 돌리고 실존의 주관적·내면적인 입장에서 절대화시켜 실존의 ‘교설체계(敎說體系)’를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묻혀 있으려 할 때, 실존철학은 본래의 체계외적(體系外的)인 실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던 낡은 추상적 관념론의 입장으로 역전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실존철학의 커다란 한계가 있다. 실존 철학의 탄생을 일찍이 간파하고 크게 평가했던 철학사가 하이네만(1889- 1970)이 ‘실존’은 사상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규제 원리일 수는 있어도 사상의 내용체계를 만들어 가는 구성 원리는 아니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위키백과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경우에는 ‘일원화된 체계와 고정된 구조를 부정하며 다원적인 가치를 긍정’하면서 구조의 상대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실존주의와 연결되는 맥락이 있긴 하다. 다만 실존주의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자유와 미래가능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문화적 구조의 해체나 재조정을 통해 자유의 증진과 가능성을 살펴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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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allegory)
알레고리(allegory)는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으로, 주로 문학에서 사용된다. 때론 우의(寓意), 풍유(諷喩)로 불리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그 상세함에서 은유보다 길게 지속되고 더 충만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유추가 이성이나 논리에 호소하는 데 반해 알레고리는 상상에 호소한다. 우화는 하나의 명확한 교훈을 가진 짧은 알레고리로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은유가 단어나 문장에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알레고리는 우화처럼 이야기 전체 등으로 훨씬 큰 범위를 지닌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위키백과
알레고리 :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 주로 도덕적, 교훈적, 풍자적 내용을 표현할 때 쓰인다. 은유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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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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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크리스티안 키르케고르가 1840년에 그린 키르케고르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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