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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무비즘 (27), 실존주의 모더니즘 (8), 앙가주망 (24), 사상시 (3) 슬픈 방 2 ― 방과 나 / 박석준

나의 신시 30 슬픈 방 2 방과 나

나의 무비즘 (27), 실존주의 모더니즘 (8), 앙가주망 (24), 사상시 (3)

1988-05 / 1988-12 / 1992

박석준 /

슬픈 방 2 방과 나

.

.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계림동 을 떠날 무렵 대학교 3학년인 나에게

    “니 큰형은 크리스마스 날 석방될 것이다. (중략)

    하셨는데.

― 「아버지 무너진 집

.

    그러자 밤이 스치고, 나는 자야만 했다.

    일상, 그 속에 바람과 슬픔의 사정이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난가을 한 저녁, 수감된 형들을 그리워하며 나팔꽃 시든 화분을 가꾸고 있던

    어머님의 어슴푸레한 모습을 잊지 못하면서도

― 「일상 1-1

.

    그 들을 얻어야 할 것 같아야. 형들이 나오면

    식구대로 잠잘 자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885월 중순의 토요일,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자신이 인식한 상황을 예감처럼 털어놨다.

    (중략)

    움푹 들어간 그 방들 역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중략)

    앞닫이, 30년도 넘게 어머니 곁에 둔, 어머니의 손으로

    장만한 물적 재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 앞에 앉아,

    자신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들, 즉 노트나 사진 등

    형들과 관계된 물건들, 내가 어렵게 다녔던 고등학교

    모자, 아버지의 사진 과거와 관계된물건 차근차근

    정리하여 앞닫이 속으로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 「슬픈 방 1

.

.

.

<원작> 2020-03-25

슬픈 방 2 방과 나

 

 

  885월의 어느 토요일. 직통버스를 기다리며 줄서

  있는 나에게는 한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를, ‘방과 나의 존재에 관련한 생각이.

  ‘!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지만

  나에겐 방이 주로 바람과 바램과 슬픔의 사정들을

  안고서 허덕이는 모습들로 푸접없이 다가왔을 뿐이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방이 두 개의 방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두 방에서 형들과도 함께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형들이 받아들여야 할 텐데…….’

 

  나는 12월 어느 황혼 무렵에 광주행 버스 속에서

  “지난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 크리스마스 …….”

  하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를 찾아 그 소식을 알렸다,

  그날 밤, 나는 열려진 앞닫이 문과 앞닫이 속에서 나왔을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 곁에는 그 물건들을 담고 있었을

  자주색 보자기가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피곤하실 텐데…….”

  “김장 담가 둔 장독 있디야. 내가 그 큰 장독 속에다

  짚숙이 숨겨 놔서 요것이라도 남았제. 심새 항아리도

  뒤지더라. 장독이 크고 김치까지 담아 놔서 그랬는지,

  다행이 고놈들 손이 짚은 데까장은 안 가더라만.”

  동문서답 같은 반응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손길을 주고

  있는 것은 10년 전쯤에 형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었다.

 

  1220일 밤, 어머니는 청소를 하고 방에 이부자리를

  가지런히 펼쳐놨다. 형들이 오면 쓸 거라고 10년간

  농 속에 갇혔던 이부자리였다.

  내게 더욱 애틋한 것은, 어느 가을 저녁

  어머니가 손길을 주는, 마당에 놓인 나팔꽃 화분이었다.

  그 화분은 그 저녁처럼 약간의 흙을 담고 있을 뿐이지만,

  겉이 깨끗이 씻겨 있었다.

 

  1221일 새벽, 어머니는 식구들을 깨우셨다.

  누나와 잔디, 작은형, , 어머니는 아침이 다 된 때에야

  철문에서 나오는 큰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소리와 모습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형은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는데,

  한 시간쯤 지난 뒤에야 어머니 품에로 안길 수 있었다.

  오후, 수와 함께 안동교도소에 갔지만 출감한 삼형*을

  만났을 뿐 남의집살이 일 때문에 헌이 순천으로 가서,

  헌과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10년 만에

  한 곳에서, 유동 슬픈 방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10년 전 나를 광주피정센터로 데리고 갔을 때의 그 갈색

  바지에다가 흰 고무신 차림을 하고서 돌아온 삼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몹시 비통해 했다.

  형들이 석방되면 잠이라도 잘 수 있어야 하니까 두 개의

  방이 필요하다고, 우리들에게 털어놓으셨던

  어머니의 바람은 형들이 가석방된 바로 그날에 바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 두 개의 방에서 삼형이 이틀간

  번갈아 자고 갔을 뿐……. 그 밤, 뜬눈으로 밤을

  어머니의 모습이 애틋한 장면으로 내게 남았다.

 

  큰형은 글 쓰는 일과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

  때문에 집 근처 여관으로 갔다.

  어머니는 형의 식사를 마련해 하루 한 번 여관으로 갔다.

  “제야, 니가 고생 많았다. 몸이 이렇게 말라버렸으니.

  우유랑 사과 세 개 사와라. 우리가 먹으면 맛있을 거다.”

  하고 남주형이 1000을 줬다.

  ‘소년 같아. 사과 값도 모르고.’ 생각하고 여관에서 나와,

  나는 돈을 보태 891월의 사과와 우유를 샀다.

 

  그리고 세월은 그 두 개의 방에 나와 어머니의 모습을

  뿌려대고 92년으로 흘러가 나를 아프게 했다.

  심장과 눈이 아파 외출이 어려운 내가 이 조금이라도

  드는 방으로 이사하자고 부탁했고,

  어머니가 절름거리며 93년 가을에 박제방을 구했다.

  방!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어서.

 

 

  * 박석률(1947-2017) : 전사.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1988.12.21.일에 석방됨.

  * 박석삼(1955- ) : 투사.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988.12.21.일에 석방됨.

  * 김남주(1946~1994)시인.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988.12.21.일에 석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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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0 2020.03.25. 01:32.내메. 박석준-3시집-0618-12-105()-5-93-1.hwp (려진/) <원작 원본>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새우)

2023-05-31 오후 6:03 (원작 최종교정: ‘줄 서/어 하/가둔/겨놔/아놔/비통해했/사 와/주 형/’ + ‘려진/은 원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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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8.05. 목포 버스터미널 : 1

    1988.12. 목포에서 탄 광주행 버스 안,

                  유동 두 개의 슬픈 방 : 2

    1988.12.20. 유동 두 개의 슬픈 방 : 3

    1988.12.21. 광주교도소, 유동 두 개의 슬픈 방 : 4

    1989.01. 유동 서울여관 : 5

    1992/1993 광주 유동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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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과 관련한 해석

  「슬픈 방 2 방과 나엔 한 가난한 가족의 구성원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어머니가 아들들이 석방되면 잠이라도 잘 수 있어야 하니까 두 개의 방이 필요하다고, 우리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두 개의 방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들들이 가석방된 바로 그날에 어머니의 바람은 바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큰아들이 글 쓰는 일과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 때문에 집 근처 여관으로 가버렸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큰아들의 식사를 마련해 하루 한 번 여관으로 갔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와 큰아들, 이 두 사람이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방식과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은 석방된 후에도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자기구속(현실참여)’ = 앙가주망을 지향했고 어머니는 자신의 바람이 바램으로 깨어지고 말았지만 원망함 없이 다시 예전 살아가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슬픈 방 2 방과 나는 이 두 사람의 실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구성, 기법

  「슬픈 방 2 방과 나!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지만!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어서.변주되면서 끝나는 구성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글은 과 관련하여 인물들을 따라 시공간이 이동하면서 사건들이 펼쳐지는(사람들이 움직이는) 무비즘 기법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글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재현하는 리얼리즘 기법과 시간과 인간 의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반영한 모더니즘 기법이 결합된 글이다.

 

표현

  “아버지가 떠올랐다.라는 표현이 불쑥 튀어나와서 긴장하게 한다. 박제방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은 말이면서도 박제“(세 들어 사는) 이고 박시봉집 주인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고놈들”, 나팔꽃 화분슬픈 방 2 방과 나를 수록한 나(박석준)의 자서전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 살펴봐야만 제대로 해석되는 표현이다. 시집의 장미의 곁에 있는 두 얼굴을 통해 고놈들형사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상 1-1을 통해 나팔꽃 화분수감된 아들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투사물임을 알 수 있.

  한데 형들이 석방된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나팔꽃 화분애틋함을 느낀다. 그리고 형들이 석방된 날에 뜬눈으로 밤을 새는 어머니의 모습애틋함을 느낀다. “에게 나팔꽃 화분어머니애틋함으로 연결되는 심상을 남긴 것이다.

  이 글은 시집의 한 부분이다. 시집에서 슬픈 방이라는 제목은 슬픈 방 1, 슬픈 방 2로 나뉘었지만, “의 방이자 어머니가 살아가는 방이며, 두 아들이 석방되면 어머니가 그 두 아들과도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방이며, 의 의식에 슬픈 방으로 남은 방이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가 살아가는 방으로만 남아버렸기에 슬픈 방이라고 가 생각하는 것이지, 슬픈 방 1, 슬픈 방 2에는 어머니가 슬퍼하는 내용은 없다. 다만 뜬눈으로 밤을 새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애틋한(애가 타는 듯이 깊고 절실한) 심정을 일으켰고 그것이 뇌리에 남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담담한 어조로 흘러간다. 그리하여 독자가 슬픔을 느낀다. 이 점이 나(박석준)의 글의 표현에 나타난 특징이다.

 

구속과 실존

  시집에서 불안한 몸”, ‘’, “형들(의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통제)된 교사 생활을 한다. 이 중 의 구속(통제)먼 곳 평교사회를 창립한 날(198712)에 사라진다.(먼 곳 4) 그리고 이 글에서(19881221일에) 형들이 가석방됨으로써 형들과 관련한 구속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에겐 불안한 몸”(나 자신)으로 인한 구속만 남는다.

  “심장과 눈이 아파 외출이 어려운”(불안한 몸을 지닌) “빛이 조금이라도 드는 방을 원한다. 이 글에서 실존암시하는 말이다. 이 글은 실존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에게 허덕이는 모습들로 푸접없이(붙임성이나 정이 없고 쌀쌀하게) 다가왔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표현이지만, 방과 나의 존재가 깊은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방과 나의 존재에서 존재실존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슬픈 방 2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라는 작가의 사상을 토로한 사상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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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교정_시집_(‘/새우’)

슬픈 방 2

방과 나

 

 

  885월의 어느 토요일. 직통버스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나에게는 한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를, ‘방과 나의 존재에 관련한 생각이.

  ‘!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지만

  나에겐 방이 주로 바람과 바램과 슬픔의 사정들을

  안고서 허덕이는 모습들로 푸접 없이 다가왔을 뿐이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방이 두 개의 방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두 방에서 형들과도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형들이 받아들여야 할 텐데…….’

 

  나는 12월 어느 황혼 무렵에 광주행 버스 속에서

  “지난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크리스마스…….”

  하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를 찾아 그 소식을 알렸다,

  그날 밤, 나는 앞닫이 문과 앞닫이 속에서 나왔을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 곁에는 그 물건들을 담고 있었을

  자주색 보자기가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피곤하실 텐데…….”

  “김장 담가둔 장독 있디야. 내가 그 큰 장독 속에다

  짚숙이 숨겨놔서 요것이라도 남았제. 심새 항아리도

  뒤지더라. 장독이 크고 김치까지 담아놔서 그랬는지,

  다행히 고놈들 손이 짚은 데까장은 안 가더라만.”

  동문서답 같은 반응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손길을 주고

  있는 것은 10년 전쯤에 형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었다.

 

  1220일 밤, 어머니는 청소를 하고 방에 이부자리를

  가지런히 펼쳐놨다. 형들이 오면 쓸 거라고 10년간

  농 속에 갇혔던 이부자리였다.

  내게 더욱 애틋한 것은, 어느 가을 저녁

  어머니가 손길을 주는, 마당에 놓인 나팔꽃 화분이었다.

  그 화분은 그 저녁처럼 약간의 흙을 담고 있을 뿐이지만,

  겉이 깨끗이 씻겨 있었다.

 

  1221일 새벽, 어머니는 식구들을 깨우셨다.

  누나와 잔디, 작은형, , 어머니는 아침이 다 된 때에야

  철문에서 나오는 큰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소리와 모습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형은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는데,

  한 시간쯤 지난 뒤에야 어머니 품에로 안길 수 있었다.

  오후, 수와 함께 안동교도소에 갔지만 출감한 삼형을

  만났을 뿐 남의집살이 일 때문에 헌이 순천으로 가서,

  헌과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10년 만에

  한 곳에서, 유동 슬픈 방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10년 전 나를 광주피정센터로 데리고 갔을 때의 그 갈색

  바지에다가 흰 고무신 차림을 하고서 돌아온 삼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몹시 비통해했.

  형들이 석방되면 잠이라도 잘 수 있어야 하니까 두 개의

  방이 필요하다고, 우리들에게 털어놓으셨던

  어머니의 바람은 형들이 가석방된 바로 그날에 바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 두 개의 방에서 삼형이 이틀간

  번갈아 자고 갔을 뿐……. 그 밤, 뜬눈으로 밤을 새우

  어머니의 모습이 애틋한 장면으로 내게 남았다.

 

  큰형은 글 쓰는 일과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

  때문에 집 근처 여관으로 갔다.

  어머니는 형의 식사를 마련해 하루 한 번 여관으로 갔다.

  “제야, 니가 고생 많았다. 몸이 이렇게 말라버렸으니.

  우유랑 사과 세 개 사 와. 우리가 먹으면 맛있을 거다.”

  하고 남* 을 줬다.

  ‘소년 같아. 사과 값도 모르고.’ 생각하고 여관에서 나와,

  나는 돈을 보태 891월의 사과와 우유를 샀다.

 

  그리고 세월은 그 두 개의 방에 나와 어머니의 모습을

  뿌려대고 92년으로 흘러가 나를 아프게 했다.

  심장과 눈이 아파 외출이 어려운 내가 빛이 조금이라도

  드는 방으로 이사하자고 부탁했고,

  어머니가 절름거리며 93년 가을에 박제방을 구했다.

  방!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어서.

 

 

  * 김남주(1946~1994)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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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3. 16:44 박석준시집_시간의색깔은자신이지향하는..._내지(20.04.23).pdf (비표준어를 표준어 /새우으로 편집자가 임의로 교정)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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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0-03-20 (있었다. /사건으로 …… .”/고무신,)

슬픈 방 2 방과 나

 

 

  885월의 어느 토요일. 직통버스를 기다리며 줄서

  있는 나에게는 한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를, ‘방과 나의 존재에 관련한 생각이.

  ‘!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지만

  나에겐 방이 주로 바람과 바램과 슬픔의 사정들을

  안고서 허덕이는 모습들로 푸접없이 다가왔을 뿐이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방이 두 개의 방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두 방에서 형들과도 함께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형들이 받아들여야 할 텐데…….’

 

  나는 12월 어느 황혼 무렵에 광주행 버스 속에서

  “지난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 .

  하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를 찾아 그 소식을 알렸다,

  그날 밤, 나는 열려진 앞닫이 문과 앞닫이 속에서 나왔을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 곁에는 그 물건들을 담고 있었을

  자주색 보자기가 펼쳐져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김장 담가 둔 장독 있디야. 내가 그 큰 장독 속에다

  짚숙이 숨겨 놔서 요것이라도 남았제. 심새 항아리도

  뒤지더라. 장독이 크고 김치까지 담아 놔서 그랬는지,

  다행이 고놈들 손이 짚은 데까장은 안 가더라만.”

  동문서답 같은 반응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손길을 주고

  있는 것은 10년 전쯤에 형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었다.

 

  1220일 밤, 어머니는 청소를 하고 방에 이부자리를

  가지런히 펼쳐놨다. 형들이 오면 쓸 거라고 10년간

  농 속에 갇혔던 이부자리였다.

  내게 더욱 애틋한 것은, 어느 가을 저녁

  어머니가 손길을 주는, 마당에 놓인 나팔꽃 화분이었다.

  그 화분은 그 저녁처럼 약간의 흙을 담고 있을 뿐이지만,

  겉이 깨끗이 씻겨 있었다.

 

  1221일 새벽, 어머니는 식구들을 깨우셨다.

  누나와 잔디, 작은형, , 어머니는 아침이 다 된 때에야

  철문에서 나오는 큰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소리와 모습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형은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는데,

  한 시간쯤 지난 뒤에야 어머니 품에로 안길 수 있었다.

  오후, 수와 함께 안동교도소에 갔지만 출감한 삼형을

  만났을 뿐 남의집살이 일 때문에 헌이 순천으로 가서,

  헌과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10년 만에

  한 곳에서, 유동 슬픈 방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10년 전 나를 광주피정센터로 데리고 갔을 때의 그 갈색

  바지에다가 흰 고무신, 차림을 하고서 돌아온 삼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몹시 비통해 했.

  형들이 석방되면 잠이라도 잘 수 있어야 하니까 두 개의

  방이 필요하다고, 우리들에게 털어놓으셨던

  어머니의 바람은 형들이 가석방된 바로 그날에 바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 두 개의 방에서 삼형이 이틀간

  번갈아 자고 갔을 뿐……. 그 밤, 뜬눈으로 밤을

  어머니의 모습이 애틋한 장면으로 내게 남았다.

 

  큰형은 글 쓰는 일과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

  때문에 집 근처 여관으로 갔다.

  어머니는 형의 식사를 마련해 하루 한 번 여관으로 갔다.

  “제야, 니가 고생 많았다. 몸이 이렇게 말라버렸으니.

  우유랑 사과 세 개 사와. 우리가 먹으면 맛있을 거다.”

  하고 남주형1000을 줬다.

  ‘소년 같아. 사과 값도 모르고.’ 생각하고 여관에서 나와,

  나는 돈을 보태 891월의 사과와 우유를 샀다.

 

  그리고 세월은 그 두 개의 방에 나와 어머니의 모습을

  뿌려대고 92년으로 흘러가 나를 아프게 했다.

  심장과 눈이 아파 외출이 어려운 내가 빛이 조금이라도

  드는 방으로 이사하자고 부탁했고,

  어머니가 절름거리며 93년 가을에 박제방을 구했다.

  방! 방은 사람이 돌아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실내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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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메모),

2020-03-20 오후 5:22 2020-03-20 오후 9:50 (초고) (내메) (있었다. /사건으로 …… .”/고무신,)

= 2020.03.21. 01:56.내메. 박석준-3시집-0618-12-105()-5-93-1.hwp (초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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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어머니(1995-05). img433

  어머니(1995-05). img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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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나-작은형-수. img409

  큰형--작은형-. img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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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나-삼형-형수-누나-누나 작은딸. 20240516_183453-1

  헌--삼형-형수-누나-누나 작은딸. 20240516_183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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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 큰형(1989). img402

  김남주 시인- 큰형(1989). img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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