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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88), 사상시 (25) 슬픔 / 박석준

나의 신시 191 슬픔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88), 사상시 (25)

2019-10-22 (11-08)

박석준 /

<원작 원본> (일인시위)

슬픔

 

 

  슬픔은 의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

  슬픔은 수용에서 일어난다.

  슬픔은 나에게서, 나 아닌 것에서 일어나

  나를, 나 아닌 것을 어둡게 하지만

  슬픔은 나에게 있을 뿐이며, 상황에 있을 뿐이.

  슬픔은 상황에 내재한, 나에게 내재한 사정을 의식했을 때

  슬픔은 상황에 내재한, 나에게 내재한 사정이 내 감정을 엮을 때,

  나의 시력과 경험과 처지와 인지를 순간적으로 붙잡아 내게 일어난.

  슬픔은 눈물, 고독, 좌절 따위를 수반하고, 슬픈 일을 내 의식에 저장한.

  일이 벌어진 후 슬퍼질 때, 슬퍼할 때, ‘슬픈’을 생각할 때, 슬픔은 존재한.

 

  노동의 시간을 날개 아래에 감추

  주52시간 노동을 말하

  취업에 어려워하고, 알바를 하고, 비정규직 파업을 하

  해고 노동자 농성 일인위를 공중에서 하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추락해서 죽

  먹고살기 어려운 생활고로 가족이 같이 죽,

  휴가를 해외로 가지만일본 여행은 감소했다 한다.

 

  정부는 9억 이하를 서민용 주택이라 하

  나는 1억도 없어,

  6억인 아파트를 5억 5천에 샀다는 선전에

  슬픔을 느끼는데,

  TV방송에서는

  사람들이 검찰 개혁하라공수처를 설치하라 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공수처 없애라 한다.

 

  그런데 슬픔이 일어난 사람, 슬픈 일을 본 사람은

  슬픔이 쓸쓸함으로 기억되나슬픔의 바닥은 볼 수 없다.

  슬퍼질 때, 슬퍼할 때, 슬픔을 생각할 때 슬픔이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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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7 ∼ 2020-01-31 <원작>

= 2020.03.09. 05:11.박석준-3시집-0618-12-105()-4-2.hwp (일인위) <원작 원고 원본>

= 2020.06.08. 07:22.메. 슬픔.hwp <원작 원고>

= 『광주전남 작가』 26호(2020.07.31.)

=↛ 2023.01.06. 16:29. 박석준 시집_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_내지(0106).pdf (1 위) <원작 이본>

시집_『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2023.03.20. 푸른사상)

→ 2023-0-10 오후 10:48 (원작 원본 교정) (주 52/일인 시위/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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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2019년 1월 ∼ 10월 22일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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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객관적 해석

  「슬픔」은 ‘슬픔’이 일어나는 원인, ‘슬픔’의 성격을 표현한 후에 급변하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슬픔’들을 제시하고, 다시 슬픔이 일어나는 원인을 표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슬픔」은 자본주의 한국의 부조리한 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의 문제점)을 가난한 소시민인 “나”를 통해 알려준다. 「슬픔」은 멜랑콜리를 진하게 표출하고 있는데, 센티멘탈리즘이나 낭만에 관련한 것이 아니고 실존(실존주의)과 관련된 멜랑콜리여서 ‘슬픔’이란 제목으로 단 글이다. “나”는 ‘가난한 자는 생활고를 겪거나 생계에 주력하지만 부유한 자는 문화 향유에 주력한다는 것 /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의 욕망이 충돌한다는 것’이 자본주의 한국 사회가 흘려내는 모순임을 알게 되어서(수용하여서) ‘슬픔’을 느낀다.

  슬픔을 야기하는 상황(사회, 현실)이 자신의 곁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자기의 의식과 감정, 시력과 경험과 처지에 따라 이것을 슬픈 일(슬픔)로 받아들이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고 간주해버린다고 “나”는 말하고 있다. 즉 “나”는 슬픔의 ‘발생/비발생’은 ‘타인이나 타자하고의 관계성, 개별성’ 중 무엇을 우선시하느냐에 관계된 것이라고 본다.

  “나”=화자는 “슬픔은 수용에서 일어난다.”고 전한다. 많은 소시민에게 부조리하고 아픔을 주는 사회 현실이 현재 진행 중이지만 관심이 없다면 그리하여 부정하거나 수용하지 않았다면 슬픔은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이 있어서 슬픔이 발생한다(이런 사람이 슬픔을 만든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슬픔’이 갖는 패러독스이다. 한 상황이 나에게는 슬픔을 주지 않는데 타인에게는 슬픔을 주니까.

  이 글은 어떤 상태가 가난함인가(가난과 부유의 경계는 어디인가?)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정부의 정책에 대한 안타까움, 슬픔과 비판을 전하면서, 기득권자들의 부조리하고 부적절한 행위도 비판한다.(앙가주망 성향을 보인다.) 「슬픔」은 “슬픔이 쓸쓸함으로 기억되나, 슬픔의 바닥은 볼 수 없다.”는 사상을 담고 있는 사상시이다.

  이 글에서 몇 가지 기법이 눈에 띈다.

    *상징 : 날개(잘살 수 있다는 환상)

    *동일 주어 문장 반복 + 두운 + 각운 : ‘슬픔은 ∽ 다’

    *‘- 서술절 문장을 변형, 확대 : 각운 +

      이중대조 →

      (해고 노동자 농성 일인시위를 공중에서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추락해서 /먹고살기 어려운 생활고로 가족이 같이 ,)

      (정부는 9억 이하를 서민용 주택이라 하/나는 1억도 없어,/6억인 아파트를 5억 5천에 샀다는 선전에/슬픔을 느끼는데,)

    *“휴가를 해외로 가지만, 일본 여행은 감소했다 한다.”라는 뉴스로 글이 창작된 시기와 상황 암시. → 2019년 7월 2일부터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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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시 191_

<원작 이본2023-03-20_시집 (1 위)

슬픔

 

 

  슬픔은 의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수용에서 일어난다.

  슬픔은 나에게서, 나 아닌 것에서 일어나

  나를, 나 아닌 것을 어둡게 하지만

  슬픔은 나에게 있을 뿐이며, 상황에 있을 뿐이다.

  슬픔은 상황에 내재한, 나에게 내재한 사정을 의식했을 때

  슬픔은 상황에 내재한, 나에게 내재한 사정이 내 감정을 엮을 때,

  나의 시력과 경험과 처지와 인지를 순간적으로 붙잡아 내게 일어난다.

  슬픔은 눈물, 고독, 좌절 따위를 수반하고, 슬픈 일을 내 의식에 저장한다.

  일이 벌어진 후 슬퍼질 때, 슬퍼할 때, ‘슬픈’을 생각할 때, 슬픔은 존재한다.

 

  노동의 시간을 날개 아래에 감추고

  주 52시간 노동을 말하고

  취업에 어려워하고, 알바를 하고, 비정규직 파업을 하고

  해고 노동자 농성 1인 시위를 공중에서 하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추락해서 죽고

  먹고살기 어려운 생활고로 가족이 같이 죽고,

  휴가를 해외로 가지만, 일본 여행은 감소했다 한다.

 

  정부는 9억 이하를 서민용 주택이라 하고

  나는 1억도 없어,

  6억인 아파트를 5억 5천에 샀다는 선전에

  슬픔을 느끼는데,

  T송에서는

  사람들이 검찰 개혁하라, 공수처를 설치하라 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공수처 없애라 한다.

 

  그런데 슬픔이 일어난 사람, 슬픈 일을 본 사람은

  슬픔이 쓸쓸함으로 기억되나, 슬픔의 바닥은 볼 수 없다.

  슬퍼질 때, 슬퍼할 때, 슬픔을 생각할 때 슬픔이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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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6. 16:29 박석준 시집_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_내지(0106).pdf (1 위)

시집_『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2023.03.20.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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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무성-주선-기창-박석준_광주시. 2019-09-01

  무성-주선-기창-박석준_광주시. 2019-09-01 오후 6:02. 1567344317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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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기한-제영-나_휴머니스트 회원들_광주. 2019-07-01

  오철-기한-제영-나_휴머니스트 회원들_광주. 2019-07-01. 1562023638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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