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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85), 추모시 (1)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 박석준

나의 신시 188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85), 추모시 (1)

2019-07-20 ∽ 07-21

박석준 /

(원작 교정)_시집 (세상을 고)

그리워할 사람그리워하는 사람

 

 

  오늘 아침 충무로의 낡은 건물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여니,

  여러 갈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가난한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태풍이 소멸해 사라져갔지만, 막내가 텐트를 치고

  삼형이 담당하여 낮 12시에 마석모란공원에서 시작한

  고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엔 그 비가 스몄다.

  해직 교수와 시인 둘이 광주에서 올라와 빗속에 참석했다.

  비가 그치고, 광명으로 가 병원에서

  3년 6개월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작은형을 보고,

  7시에 충무로로 돌아와 밤 10시까지 사람들을 만났다.

  추모식에 온 세 사람, 서울의 시인, 그리고 89년 전교조

  건설 및 교사 해직 과정에 고등학생 운동을 한 두 제자를.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된 박석률 형이 9년 세월이 지난 후 풀려났다.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 어머니는 고문과 폭력으로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고, 동생들은 남의집살이하거나 학교를 중단해서, 교사인 내가 번 돈을 모아 88년에 마련한 두 칸 셋방만이 무기수였던 형이 쉴 곳이었다.

  식구들은 하룻밤을 함께 자고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해직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나의 길을 갔다.

  다시 교사로 살아가면서, 50살이 넘어 시를 짓는 사람,

  시인의 길을 모색했다. 2017년 2월에 중도 퇴직한 후로는

  교사 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교사도, 노동자도, 농민도, 작가도 아닌 형은

  74년에도, 95년에도 수감되어 10개월씩 살았으나

  과장됨 없이 2017년 7월에 세상을 떴다.

  그냥 ‘전사’로 남았다.

 

  사람마다 지향이 달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고 그리워할 사람이 따로 남는다.

  형을 그리워하는 때 나에겐 분리와 반항, 가난함과 삶의

  진실이 문제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비 내리는 오늘

  아침 나에겐 그리워할 사람으로 박석률 형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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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 2020.04.20. 15:49.메. 2020년_04월(박석준)해설.hwp (중도퇴직/교사운동) <원작 원고>

∽ 2020.05.14. 18:01 박석준시집_시간의색깔은자신이지향하는빛깔로간다_내지(0514).pdf (교정: 중도 퇴직/교사 운동)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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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2019-07-20 ∽ 07-21 (2주기 추모식 및)

      형: 1964년 6·3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

           1974.4.3 – 1975.2.15. (민청학련, 7년 형),

           1979.11.3. - 1988.12.25.(남민전, 무기 형),

           1995.11 – 1996.8. (범민련 수감)

    나:  1983.3(4월 정식임용) – 1988.5.30.(방 마련) -

           1989.8.14.(해직),

           1994.3.2.(복직) - 2017.2.(명예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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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해설

  위의 작품의 화자는 “오늘 아침 충무로의 낡은 건물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열고 “여러 갈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다가 “가난한 비”를 인식하고 어제의 일들을 떠올린다. “막내가 텐트를 치고/삼형이 담당하여 낮 열두 시에 마석모란공원에서 시작한/고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이 있었던 것이다. 큰형의 추모식에는 고맙게도 “해직 교수와 시인 둘이 광주에서 올라와 빗속에 참석했다”. 화자는 추모식을 마치고 “광명으로 가 병원에서/3년 6개월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작은형을 보고,/일곱 시에 충무로로 돌아와 밤 열 시까지 사람들을 만났다”. “추모식에 온 세 사람, 서울의 시인, 그리고 89년 전교조/건설 및 교사 해직 과정에 고등학생 운동을 한 두 제자” 등이었다.

  화자는 추모식을 치르고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큰형을 다시금 떠올리고 자신이 걸어온 길도 되돌아본다.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된 박석률 형”은 “9년 세월이 지난 후 풀려났다”.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고문과 폭력으로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고, 동생들은 남의집살이하거나 학교를 중단”했다. 경제적인 활동을 할 가족이 없어 교사인 화자가 “번 돈을 모아 88년에 마련한 두 칸 셋방만이 무기수였던 형이 쉴 곳이었다”. 그렇게 “식구들은 하룻밤을 함께 자고 흩어졌다”. 그 뒤 화자는 큰형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전교조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직을 선택”했으며 자신의 “길을 갔다”. “쉰 살이 넘어 시를 짓는 사람,/시인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물론 “2017년 2월에 중도 퇴직한 후로는/교사 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교사도, 노동자도, 농민도, 작가도 아닌 형”이 “74년에도, 95년에도 수감되어 10개월씩 살았으나/과장됨 없이 2017년 7월에 세상을” 뜬 역사를 잊지 않는다. “그냥 전사로 남은 큰형을 가슴속에 새기는 것이다. “박석률 형”은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외에도 1995년 11월에서 1996년 8월까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통일 논의는 남북의 당국자를 위시한 소수의 사람들이 주도해왔는데, 통일 논의가 정치인이나 누구의 독점물이 아니고, 국민 모두의 것이며, 정치적 통일에 앞서 민족공동체의 통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와 ‘말할 권리’가 첫째로 보장되어야 합니다.”라는 큰형의 주장은 사법기관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범민련은 조국 통일의 실현을 목적으로 남한, 북한, 해외동포들이 결성한 통일운동 단체였지만, 1997년 대법원은 이적단체로 판결을 내렸다.

  화자는 추모식을 마친 뒤 민청학련 사건, 남민전 사건, 범민련 사건의 가담으로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큰형을 다시금 가슴에 품는다. 가족들의 가난과 불행과 불안이 큰형의 수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지만, 그의 삶을 기꺼이 껴안는다. 큰형을 한 개인적인 존재를 넘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지향이 달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이유가 따로 있고 그리워할 사람이 따로 남는”데, 화자에게 형은 “분리와 반항, 가난함과 삶의/진실이 문제로 다가”온다. 결국 “비 내리는 오늘/아침 나에겐 그리워할 사람으로 박석률 형이 남”는 것이다.

  화자는 큰형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끝까지 남민전 전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민주주의 진전과 조국 통일을 이루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속보, 나의 길–존재함을 위하여」)는 삶의 진리를 일깨워준 큰형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지향하는/색깔로 시간을 만들어가”(「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고자 시인의 길을 걷는다.

- 맹문재 문학평론가,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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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형제로 살아간 두 사람의 사람

  우리 민족은 분리되어 남한, 북한이라는 국가의 성원으로 따로따로 살아간다. 그렇더라도 이 분리된 구성원들은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형제라고 볼 수 있다.

  글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엔 박석률 형(선생)을 추모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박석준 시인이 이 글을 썼다. 실제로 “박석률”은 남민전 사건의 무기수이고 2017년 7월에 사망했다. 그리고 박석준은 실제로 “박석률”의 동생이고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해직을 선택”했다. 그 후 “시인”이 되었다. 글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화자인 “나”는 시인 박석준이다. 즉 이 글은 박석준이 2019년 7월에 추모시 형식으로 쓴 실화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박석준)의 자서전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시집은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로 시작한다. 이 첫 작품은 청년 시절(1974년, 28살)에 “박석률 형이 민청학련사건으로 수감되었다.”, 박석률 형이 죽음을 앞둔 19살 소년 나를 서울 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시켜 살려냈다, 1979년에 “남민전 사건으로 박석률 형이 투옥되었”다, 라고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전한다. 그러고는 “새벽길에서 나는 7년이 넘어도 갇혀 있는/박석률 형 얼굴을 떠올린다,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지향하는/색깔로 시간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생각을 이어간다.”라는 표현으로 인생에 대한 나의 사상을 밝히면서 끝낸다.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에선 9년을 넘게 수감생활 한 형이 석방되었고 그 후 ‘범민련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기도 하면서 그냥 전사로 살다가 사망했음을 알려준다. “나”는 “오늘 아침” 내리는 비로 인해 “박석률 형”을 떠올렸고 결국 “박석률 형”을 “그리워할 사람”으로 남기게 된다. 왜 그랬을까?

  한데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은 시집의 첫 작품과 연결하면 ‘박석률, 박석준’ 이 두 사람의 인생을 형상화한 글이 된다. 두 사람의 인생에서 공유한 요소는 형제라는 것, 운동을 했다는 것뿐이지만.

  이 글은 ‘내가 형을 그리워하는 이유’를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떴고 그냥 전사로 남았다’로 암시하고 있다. ‘사람마다 그리워하는 사람, 그리워할 사람이 다른 이유’를 ‘지향이 다름’에 두었다.

  이 글이 실린 시집은 제목이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이다. 자신의 지향에 따라 시간의 색깔(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은 ‘나’, ‘타인’이다. 그래서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사람은 개인적인 존재로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나(박석준)는 나만이라도 “박석률 형을 한 개인적인 존재를 넘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박석률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충무로의 낡은 건물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열고 “여러 갈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다가 “가난한 비”를 인식하고 어제의 일들을 떠올린다. “가난한 비”는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 ‘가난한 사람’, ‘빼앗긴 사람’, ‘소외된(버려진) 사람’, ‘가려진 사람’,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치가 줄어든 사람’ 등을 내포한 상징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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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 이유

  나(박석준)는 이 글을 고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을 한 다음날(2019-07-21일)에 광주로 돌아와서 썼다. 남양주 마석모란공원에서 추모식을 끝내고 서울 을지로로 해직 교수와 세 시인과 제자 둘을 만나고 와서 충무로의 삼형 집에서 잤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창밖에 가난한(가는) 비가 내리고 있어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한국의 정치 사회 현실이 부조리하여 운동을 한 사람이 많다. 그리하여 구속되어 죄수로 살아간 사람이 많았는데, 나의 형은 무기수로 9년여를 살았다. 9년여 만에 사회로 돌아왔으나 민주 단체에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형은 다시 1995년에 범민련 사건으로 수감자가 되었고 석방된 후에도 통일 운동에 주력했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찾아와 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일들은 나에게, 인생과 삶의 진실, 삶의 의미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는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 ‘사람마다 그리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고 그리워할 사람이 따로 남은 것’은 이것이 현실에 표현된 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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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2020-03-17 (죽었고)

그리워할 사람그리워하는 사람

 

 

  오늘 아침 충무로의 낡은 건물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여니,

  여러 갈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가난한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태풍이 소멸해 사라져갔지만, 막내가 텐트를 치고

  삼형이 담당하여 낮 12시에 마석모란공원에서 시작한

  고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엔 그 비가 스몄다.

  해직교수와 시인 둘이 광주에서 올라와 빗속에 참석했다.

  비가 그치고, 광명으로 가 병원에서

  3년 6개월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작은형을 보고,

  7시에 충무로로 돌아와 밤 10시까지 사람들을 만났다.

  추모식에 온 세 사람, 서울의 시인, 그리고 89년 전교조

  건설 및 교사해직 과정에 고등학생 운동을 한 두 제자를.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된 박석률 형이 9년 세월이 지난 후 풀려났다.

이미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고문과 폭력으로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고, 동생들은 남의집살이하거나 학교를 중단해서, 교사인 내가 번 돈을 모아 88년에 마련한 두 칸 셋방만이 무기수였던 형이 쉴 곳이었다.

  식구들은 하룻밤을 함께 자고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해직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나의 길을 갔다.

  다시 교사로 살아가면서, 50살이 넘어 시를 짓는 사람,

  시인의 길을 모색했다. 2017년 2월에 중도퇴직한 후로는

  교사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교사도, 노동자도, 농민도, 작가도 아닌 형은

  74년에도, 95년에도 수감되어 10개월씩 살았으나

  과장됨 없이 2017년 7월에 세상을 떴다.

  그냥 ‘전사’로 남았다.

 

  사람마다 지향이 달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고 그리워할 사람이 따로 남는다.

  형을 그리워하는 때 나에겐 분리와 반항, 가난함과 삶의

  진실이 문제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비 내리는 오늘

  아침 나에겐 그리워할 사람으로 박석률 형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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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메모) ∼ 2020-03-17 오전 1:19 (죽었고) (초고)

= 2020.03.17. 16:43.내메. 박석준-3시집-0618-12-푸105(교)-5-2. hwp (초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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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자주민주 통일의 전사 박석률의 묘. 마석모란공원 열사묘역. 20190720

  자주민주 통일의 전사 박석률의 묘. 마석모란공원 열사묘역. 20190720_12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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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20190720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20190720_1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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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20190720_124519

  박석률 선생 2주기 추모식.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딸. 20190720_12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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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충무로에 내리는 비. 20190721_081821

  서울시 충무로에 내리는 비. 20190721_08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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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창-다윗-나_서울 충무로 2019-07-20

   기창-다윗-나_서울 충무로 2019-07-20. FB_IMG_156366963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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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국-나_서울 충무로 2019-07-20

   성국-나_서울 충무로 2019-07-20. FB_IMG_1563712947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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