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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실존주의 모더니즘 (64) 눈을 감지 못하는 밤 / 박석준

나의 신시 151 눈을 감지 못하는 밤

나의 실존주의 모더니즘 (64)

2015-02-02

박석준 /

<원작>

눈을 감지 못하는 밤

 

 

  점심에 뜻없이

  걷던 영광의 골목길에서

  내가 버리고 싶었던 건

  슬픔

  이었다.

 

  불타는 금요일 상무지구

  어두워지는 시간,

  ‘고독하게 살아라’라는 유서처럼

  차가워지는 삶이

  나를 눈 뜨게 한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그 모양으로 하다가 사람을 버렸다

  지껄였던 날이

  비수처럼 내 안을 별안간 드러내었던 과거가

 

  오늘도 흐르는

  ‘밤’을 눈 뜨게 한다.

 

  꿈틀거리는 인형에

  심란해져

  어쩔 줄 모르게 가버린 지난 밤이

  아직 삶의 쓸쓸한 조각으로 남아 잇는데

 

  또 찾아온 밤이

  나를 아무렇게나 있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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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4 ∽ 2015.02.02. 10:14. 카페 가난한 비_문병란 시인(선생님)께 <원작>

→ https://cafe.daum.net/poorrain/FB7E/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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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2015-02-02. 영광군 영광공고 주변 골목길. 광주시 상무지구

    2005-05-24. 순천시 순천여고 주변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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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객관적 해석

  「눈을 감지 못하는 밤」 불면증에 시달리는 시인의 마음, 그 悔恨(연민)과 아픔을 생각해 보았소. 영광의 골목길에서 버리고 싶었던 슬픔, 딱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러기에 더욱 슬픈지 모를 그 버리고 싶은, 어쩌면 어리석음 같은 진실치 못한 일상의 속된 대화들 속에서 소모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진실, 그 본체를 아파하는 그 ‘슬픔’을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오.

  불타는 금요일 상무지구, 어두워지는 시간, 아마도 네온사인 鬼火(귀화)같이 눈을 뜨는 그 허영의 불길 같은 인파 속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안고, 유서를 쓰고 싶은 그 밤이 눈뜨게 하는 생의 자각은 또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그 무엇이 이 시인을 쫓는 것일까. 비수처럼 과거가 옆구리를 파고드는 것일까. 조국하고도 민주국가인데, 그는 왜 안주할 수 없고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고 누구의 품안에도 고일 수 없을까. 그러면서도 눈뜨게 하는 밤의 자각, 혼자라는 그 절망, 대상도 없이 절교장을 쓰고 싶은. 왜 그는 술집에서 술잔을 나누면서도 혼자일까. 사람들이 모두 꿈틀거리는 인형으로 보일까. 고독이 심각하다 중증이다.

  다시 오는 밤이 취할 수도 없고 자기를 방기할 수도 없고 불면의 밤, 그는 또 자기와 싸우는 것일까. 자신과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일까. 나르시스의 병은 자아도취 자기애였는데, 박석준은 지금 누구와 싸우는 것일까. 그 不和(불화)의 대상은 이 시 속에서 자기마저 他人(타인)이 되어 있는 너무도 잔인한 自虐(자학)인 것 같다.

  빗나간 대화들 시간의 소모에 불과한 잡담과 술잔나누기, 그 시간들마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하겠소. 자신에게 향한 자의식의 대상을 俗人(속인)들에 향해 그것을 사랑과 화해로 바꾸어 보오. ‘나’라는 일인칭 단수보다 ‘우리’라는 너와 나가 어우러진 복수개념을 생각해 보오. we, wri, 우리, 확실히 따뜻해지오. 거기서 우정이나 사랑이 생겨난다고 생각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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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7일 문병란

= 2015.08.14. 23:57. 카페 가난한 비_2015-02-07

 https://cafe.daum.net/poorrain/FB7E/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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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 노트

  나(박석준)는 목포에서 근무하는 2003년 2월에 불합리한 한 사건이 나에게 다가와서 ‘나는 사회적 위치를 잃어가는 사람이고, 존재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를 살려내고 싶어서 나는 2004년 순천 근무를 선택했다. 그런데 세상(순천에서의 교사 조직)은 곧 나에게 소외된 시간을 만들어냈다. 순천에서 근무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2005년 봄에 나는 (전교조) 조직 속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내 존재 가치를 거의 잃은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목포로, 이어 영광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그런데 영광에서 근무한 지 2년이 채 안 된 2015년 2월에 ‘나는 영광에서도 순천에서처럼 조직 속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괴로워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컴퓨터를 열었는데, 카페에서 나의 글들을 찾아 읽어가다가 이 글의 (초고)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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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05-05-24

눈을 감지 못하는 밤

 

 

  점심에 뜻없이

  걷던 순천의 골목길에서

  내가 버리고 싶었던 건

  슬픔

  이었다.

 

  두워지는 시간,

  ‘고독하게 살아라’라는 유서처럼

  차가워지는 삶이

  나를 눈 뜨게 한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그 모양으로 하다가 사람을 버렸다

  지껄였던 날이

  비수처럼 내 안을 별안간 드러내었던 과거가

 

  오늘도 흐르는

  ‘밤’을 눈 뜨게 한다.

 

  꿈틀거리는 인형에

  심란해져

  어쩔 줄 모르게 가버린 지난 밤이

  아직 삶의 쓸쓸한 조각으로 남아 잇는데

 

  또 찾아온 밤이

  나를 아무렇게나 있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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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4. 00:40. 카페 가난한 비_눈을 감지 못하는 밤 (초고 원본)

→ https://cafe.daum.net/poorrain/4Ps/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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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4-07-11_14:19. 영광공고에서 내다본 영광공고와 후문 쪽 마을_poorrain

  2014-07-11_14:19. 영광공고에서 내다본 영광공고와 후문 쪽 마을_poorrain

    나는 점심시간에 이 마을의 ‘주류판매’ 옆 골목길을 자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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