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실존주의 모더니즘 (63), 의식의 흐름 (25) , 부조리 시 (1) 비가 눈으로 변할 때 / 박석준

나의 신시 148 비가 눈으로 변할 때

나의 실존주의 모더니즘 (63), 의식의 흐름 (25) , 부조리 시 (1)

2014-11-17

박석준 /

비가 눈으로 변할 때

 

 

  비가 눈으로 변할 때에도

  만나던 그 사람이었지만

  만나러 갈 수 없다.

  아직은!

  보여주는 늪을

  더 보기가 싫어서

 

  비가 눈으로 변할 때에

  새로움에 기분 달라지던 나.

  비가 눈으로 변했음을 알고 난 후

  결국 ‘내가 한 짓’이라고

  그늘 속에 숨어 버린 그림자 같은 행위들이었다고

  내가 규정한다. 규정해도

  패러독스이다.

 

  어떻든 만나러는 가야겠다고 내가 간 건데,

  그 사람은 갈 데가 있다고 따라오라고

  혼자서만 아는 곳을 따라오라고 한다.

  따라는 가지만 따라가고 싶지 않는 어두움

  흐르고서 내가 보게 된 그 사람의 늪들을

  더 보기가 싫어서

  만나러 갈 수 없다.

  아직은!

 

  즐기는 한 사람과 어두운 한 사람이 한 장면 속에

  흘려내는 말들

  암시, 혹은 괴로움 또는 즐김, 혹은 패러독스.

  뜯고 음미하는 비닐봉지 속 불량과자

  같은, 그 사람과 그 사람 속에 가두는 나.

  나는 두 사람에게 다 미안할 뿐이다.

  말 한마디가 상한 말로 뇌리로 돌아오는 것은 슬프기 때문에.

.

2014.11-17 <원작>

= 2015.08.14. 23:41. 카페_-2014-11-17-비가 눈으로 변할 때 <원작 원본>

― https://cafe.daum.net/poorrain/FB7E/78

= 『경남작가』 29호(2016.07.09.)

= 시집_『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2016.12.02. 문학들)

.

.

실제상황

    2014-11-17. 광주시 동천동

.

.

Ⅰ. 말의 색깔과 부조리 인간

  「비가 눈으로 변할 때」의 “나”는 ‘부조리 인간(l'homme absurde)’이다. 지금 도피 중이다.

  사전에서 ‘그늘 : ①shade. ⓶shadow. ⓷overshadowed’과 ‘그림자 : ①shadow. ⓶ shade. ⓷overshadowed’로 설명되어 있어서 두 단어는 영어에서 말의 색깔과 뜻이 같다. 하지만 한국어로는 두 단어의 색깔과 뜻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늘’은 ‘①불투명한 물체에 가려 빛이 닿지 않는 상태. ⓶상황을 가리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영향력. 등’이고, ‘그림자’는 ‘①물체가 빛을 가리어 물체의 뒤에 나타나는 검은 형상. ⓶근심이나 불행으로 어두워진 마음. ⓷자취나 흔적’이다. 그런데 글 「비가 눈으로 변할 때」에선 “그늘 속에 숨어 버린 그림자 같은 행위”라고 표현하여서 “그림자”와 “그늘”은 그 크기(범주)와 색깔이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 이 글에서 “그늘”은 사전의 그늘⓶와 유사한 것이고 타자(“그 사람”, 타인 등)의 것이다. 그림자”는 ‘나’의 것이고, 사전의 그림자⓶, ⓷과 뜻과 색깔이 유사하지만 ‘나’의 행위이다. 이 글에서의 두 단어는 색깔은 ‘어두움’이라는 점에서 같고 ‘조금 다른 어두움’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그림자”는 ‘나’가 만든 것이다. 이처럼 이 글은 말의 색깔을 다루고 있다.

  “혼자서만 아는 곳”은 “그 사람”의 것이며 “나”에게 “어두움”을 주는 곳’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갈 데가 있다고 따라오라고/혼자서만 아는 곳을 따라오라고 한다./따라는 가지만 따라가고 싶지 않는 어두움”을 만들고 있어서 “나”는 매우 부조리한 사람(자신의 마음과 충돌한 행동을 한 사람. 타인의 의도를 몰라 갈등하면서도 타인의 요구를 채워주려고 행동한 사람)이 )이다. 게다가 “나”는 “더 보기가 싫어서/만나러 갈 수 없다./아직은!”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다. 이 표현들은 현대가 삶에 만들어내는 소외 환경과 그로 인해 개인이 실존하기가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인간을 보여준다. “나”는 “그 사람과 그 사람 속에 가두는 나./나는 두 사람에게 다 미안할 뿐이다.”라고 자신을 규정한, 이중성을 보여준 사람이다. 카뮈는 부조의 세계를 살아가는 부조리의 인간은 이러한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반항, 희망의 포기, 정열이라는 부조리적 범주를 매개삼아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한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의 인간의 전형으로서 언덕 위로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가는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를 언급한다. 「비가 눈으로 변할 때」에서는 “아직은!”이라는 표현에서 “나”의 이러한 면이 유추된다. 이 글에서 “두 사람”은 “그 사람”과 “나”이기 때문이다.

  부조리(不條理, 영어: absurdism)는 불합리·배리(背理)·모순·불가해(不可解)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원래는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적 의미만을 표시하는 말이었으나, 합리주의 철학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의미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알베르 카뮈는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왜 사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을 때 사람들이 취하는 반응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상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세 번째는 운명에 도전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반항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 중 마지막 반응은 비극적 결말을 낳는다고 했다.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양상이 「비가 눈으로 변할 때」의 “나”에게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나 세계가 그 자체로서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모순되는 두 대립항의 공존 상태, 즉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부조리한 상태이다.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집합이듯 합리는 부조리의 부분집합이다. 부분이 전체를 다 설명할 수 없는 까닭에, 부조리의 합리적 추론이란 애당초 과욕인 것이다. 요컨대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부조리를 규정하면서 인간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좌절을 각오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 인간(l'homme absurde)’은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 즉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뜻이지 ‘부조리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과 관련해보면 「비가 눈으로 변할 때」의 “나”는 ‘부조리 인간(l'homme absurde)’이다. 「비가 눈으로 변할 때」는 부조리 시이다.

.

.

Ⅱ. 객관적 해석

  「비가 눈으로 변할 때」 겨울이 왔다는 말보다 훨씬 완곡한 표현, 거기 불확실성의 이 시대 한 외로운 지식인의 망설임과 고뇌가 굴절작용을 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그 집요한 자의식의 시가 무엇보다 이 시대 약간 방향타 상실한 이 시대의 비애감을 잘 나타내고 있소. 불확실성, 이는 거대한 음모이기에 그 정체가 크기도 하지만 괴물스런 폭력이어서 시인에겐 벅찬 상대가 분명하오. 만약 변신」의 카프카(1883~1924)가 나치의 폭정치하 유대인 학살 그 시기 수용소에 있었거나 2014년 분단국 한국에 살았다면 그나마 그 작품 변신」이나 단식광대 그런 작품이 어떤 모습을 했을까요? 아마 히틀러의 유겐트가 애국인 줄 알고 세계 정복의 야망에 불타던 시대라면 수용소에서 안경과 머리털 빼앗기고 독살되었기 딱 알맞은 직업이 소설가 시인이 아닐까요. 1980년 5월~2014년 11월 현재까지 편안 밥 한 끼 못 먹으면서 지금까지 「아버지의 가난 그대로 물려받은 채 불평불만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갈 데 없는 ‘불온분자’같이 살고 있는 나나 석준 시인이나 우리에겐 너무 큰 괴물스런 현실 앞에서 기도 못 펴고 왜곡된 현실에 내 모습 비춰보나 여위고 비뚤어지고 xx에 시달리고… 거기에서 무슨 건강하고 아름다운 시가 나올 리 있겠소. 28行(행) 4聯(연) 구조의 시 속에 담긴 망설임 어두움 불안감 패러독스, 어찌할 수 없는 증오심(역겨움) 그 모든 불안에 쩌든 정서들이 모두 나의 것처럼 느껴지오. 그만큼 2014년 11월 박석준 시인의 정서적 분위기와 나의 의식(정서나 감흥)은 매우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소.

  그 동안 절실한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들은 상당히 비슷한 시대고를 앓으면서 공통분모가 형성되어 있었던 듯이 느껴지오. 기다려야 할 긴요한 이유나 무슨 의무감 같은 것은 없으면서 항상 챙겨온 마음 한 켠에서 이 외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여린 그 마음에 대한 서로의 ‘연민’이 짜증스런 나라 짜증스런 도시에서도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그 어떤 마음(이것을 나는 시라고 생각하오)이 우리를 연결해 주는 듯이 느끼오. 금번의 시가 특히 그런 이유를 조금씩 알아가게 만드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오.

 2014년 11월 21일. 문병란 (해석)

= 2015.08.14. 23:44. 카페 가난한 비_2014-11-21

 https://cafe.daum.net/poorrain/FB7E/79

.

.

부조리 문학이란 무엇인가?

  부조리의 사전적 의미는 ‘도리에 어긋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조리에서의 도피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종교적 도피 (예. 키르케고르, ‘절망의 가장 일반적인 진정한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깊은 절망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2. 형이상학적 도피(예. 하이데거, “오늘날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이 의미도 모르고 존재의 표현도 모른다.”)

  3. 문학적 도피(예. 카프카)

  4. 제도적 도피(예. 제도와 법. 도덕이란 인간이 처한 삶과 죽음의 딜레마를 제3의 의미로 치유할 수 있다고 전제가 깔린 근대적 제도 장치를 이른다.)

  이 중 부조리문학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 기본적으로 부조리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전역에 광범위하게 풍미한 반 휴머니즘적 인식을 표현하는 문학작품을 일컫는다.

  부조리 문학에서 가장 극적이고 반전의 매력을 준 문장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단편 소설 「변신」에 나온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 자신이 거대한 곤충으로 변한 것을 깨달았다.”

  카프카에게 인간의 조건은 비극 우울함이다. 동시에 인간 조건은 부조리이다. 그는 신이 ‘기분 나쁜’ 어느 날 전체 인간 종족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https://brunch.co.kr/@kimjinhyuk/257

.

.

사진

광주시 동천동 누나 집에서 본 광주시_poorrain. 20240501_124807 (1)

  광주시 동천동 누나 집에서 본 광주시_poorrain. 20240501_124807 (1)

.

광주시 푸른마을_poorrain. 20221116_111508

   광주시 푸른마을_poorrain. 20221116_111508

 .

프란츠 카프카 (1883-1924) < 변신 >

    프란츠 카프카(1883-1924) <변신>

      카프카가 19151025일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출판사에게 말한 것과 같이

      벌레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단지 어둡게 칠해져 있는 반쯤 열린 방과 주인공 아버지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

알베르 카뮈 (1913-1960):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  소설가 ,  수필가 ,  신문기자 ,  부조리문학

  알베르 카뮈(1913-1960):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소설가, 수필가, 신문기자, 부조리문학. 노벨문학상수상(19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