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시 88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
나의 모더니즘 (28)
2006-06-18
박석준 /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
한 시절, 가까이 하고 싶었던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면서 나는 그저 가끔 그 사람을 생각한다.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사람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어쩔 수 없는 모순.
그리하여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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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8 ∽ 2013-01-06 오전 6:01.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3년1월5일-2(내가 모퉁이로 사라졌다가).hwp <원작>
= 시집_『카페, 가난한 비』(2013.02.12.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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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상념(200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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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간’과 ‘사람에 대한 앎’의 관련성과 말
사람은 어떤 사람과 친한 관계가 된 이후에 그에게 보내는 말의 색깔이 선명해진다.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은 “말하고 싶은 욕망”과 밀착되어 있다. 이 글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에선 ‘①아는 어떤 사람에게 말이 가지 못하는 상황 또는 사정’이 그리움을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죽음, ⓑ어떤 사람과 헤어짐, ⓒ어떤 사람과의 연락두절 ⓓ어떤 사람이 나를 거절함 등이 ①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은 “한 시절, 가까이 하고 싶었던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나를 거절함’을 보게 한다. 그리하여 ‘아는 어떤 사람’이 (‘알았던 어떤 사람’으로 바뀌게 되어) ‘만난 적은 있으나 모르는,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았음을 보게 한다.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은 멜랑콜리에 중점을 두어 쓴 글이 아니다. “나”가 ⓓ‘어떤 사람이 나를 거절함’을 안(깨달은) 때에 “나”에게 일어나는 생각과 ‘나’의 행동을 형상화한 글이다. 이 글의 “나”라는 인물의 그리움이나 모름은 ‘어떤 사람에 대한 나의 사회성의 상실’이 흐르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말의 색깔, 그리움, 사람에 대한 앎’의 선명성은 ‘분리되거나 소통이 없는 상태의 시간’이 꽤 흘렀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부터 발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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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 과정
나(박석준)는 (인간관계에서) 정체성이 흔들거리는 상태로 2006년(49살) 6월로 흘러온 나(박석준)를 성찰하고 분석한 후에 이 글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 썼다. 내가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다. ― “말의 색깔, 그리움, 사람에 대한 앎”의 선명성은 ‘분리되거나 소통이 없는 상태의 시간’이 꽤 흘렀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부터 발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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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06-06-18
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
한 시절, 가까이 하고 싶었던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면서 나는 그저 가끔 그 사람을 생각한다.
생각이 나서.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사람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어쩔 수 없는 나의 모순.
그리하여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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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8. 23:48. 카페 가난한 비_그리움과 사람에 대한 앎 (초고)
→ https://cafe.daum.net/poorrain/F1vW/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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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319-img_3_66_0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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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9. 순천여고. PHOTO0509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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