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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나의 무비즘 (6), 실존주의 앙가주망 (4) 불로동, 부동교 ― 나는 다시 돈 버는 일을 떠나고, 인생은 내 앞에서 흘러가네! / 박석준

나의 5-1 불로동, 부동교

나의 무비즘 (6), 실존주의 앙가주망 (4)

1973-03 / 2021

박석준 /

불로동, 부동교*

나는 다시 돈 버는 일을 떠나고, 인생은 내 앞에서 흘러가네!

 

 

  16살의 어린 시절 나는

  처음으로 돈 버는 일을 해갔어.

  늙지 않는 동네에서. 3월 첫날부터.

  그런데 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는

  가지 않았지. 돈 버는 일을 떠날 때까지.

  늙지 않는 동네의 한 2층 사무실에서

  주소를 쓴 종이를 신문들에 둘러매고 길로 나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광주우체국으로 갔어.

  신문을 우송하고 나오면

  우체국 아래 관광호텔

  금남로를 건너갔지.

  궁동(宮洞) 길엔 그해 가을 그 길에서 오후에

  뜻밖에도 친구를 만나게 된 후로는

  신문을 돌리는 날에는 가지 않았어.

  친구 태섭이 부유한 동네에서 산다는 것을

  잘사는 집 아이라는 것을

  내가 발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옆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가 보았기 때문에.

  다음해 4월엔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이 수감되었어.

  나는 신문을 다 돌리면 다시 금남로를 건너

  관광호텔을 지나갔지.

  여름날 한 오후엔

  나에게만 조금 세게 부는 태풍 때문에

  금남로 길을 건너기 전에 내가 날아갔지만.

 

  내가 늙지 않는 동네로 다시 가기 시작한 건

  새로 사귄 친구 제영 때문이었어.

  우린 803월에 친구가 되었거든.

  5·18 광주항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건강해서 청년처럼 보이는 제영이

  계림동 우리 집에 찾아왔지.

  걱정되어 찾아왔다고 하곤 바로

  항쟁 기간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 왔어.

  불안하게 날을 보냈고 살아남아 죄스러웠다

  말한 나는 23살이지만 20살 때처럼 허약한 소년이었어.

  나는 제영의 집에 찾아가려고

  늙지 않는 동네 길을 걸었지.

  그 길 끝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간혹 눈길 주었어.

  20살 소년을 의지하려고 사랑하려고

  찾아온 19살 소녀가 떠오르기도 했어.

  내가 20살인 5월의 휴일에 소녀의 첫사랑을 받고

  첫 데이트를 하려고 가는 다리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건너서 공원에 간 건지는 잘 생각 안 나.

  나에게만 조금 세게 부는

  봄바람 같은 날로만 기억에 남았어.

  항쟁 기간엔 우체국 아래 관광호텔 앞에 있었지.

 

  나는 32살 때도 20살 때처럼

  허약한 소년이었어, 몸도 마음도.

  사람들은 나를 32살 청년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전교조를 결성하고는 직권면직되었지.

  돈을 벌 수 있는 먼 곳에서 814일에 떠났지.

 

내 소년이 흘러갔어,

32814, 항구도시에서.

나는 8.29의 비를 맞으며 광주 유동으로 흘러들었어.

그러고는 내 청년이 소안도에서 가버렸고

나는 51살에 푸른마을로 흘러갔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인생이 흘러갔고,

나는 다시 돈 버는 일을 떠나고,

인생은 내 앞에서 흘러가네!

부동교 아래 광주천이 흐르고,

광주의 3·1운동은 1919310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 시작되었다는 걸,

궁동에 궁궐 같은 집이 있었다는 걸

이 푸른마을에서 64살에 알게 됐어.

 

 

  * 불로동(不老洞), 부동교(不動橋) : 광주광역시에 있는 동네와 다리의 이름.

  * 궁동(宮洞) : 광주광역시에 있는 동네와의 이름. 조선 선조의 정선옹주가 이곳에 출가하여 궁궐 같은 큰집에서 살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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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6 오후 6:09 2021-03-26() 오전 0:08 (초고)

2024-04-36 오후 5:29 <수정 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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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973. 광주

    1989. 목포

    2021-03. 광주시 푸른마을. 41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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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다시 돈 버는 일을 떠나고, 인생은 내 앞에서 흘러가네

  「불로동, 부동교 어떻게 하여 역사가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64살에 알게 됐어엔 역사는 후일에 확실해지는 것이며,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역사는 가려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글의 불로동, 부동교는 변함없는 것을 대신한 말이며, 3·1운동, 민청학련 사건, 전교조 결성은 역사의 부분이다.

  한데 이 글에는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삶도 담고 있다. 개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돈 버는 일을 해야 한다. 이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오로지 운동만으로 민주화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은 불안하게 날을 보냈고 살아남아 죄스러웠다라는 말에서 민주화 운동에 힘껏 참여하지 않으면 삶에 후회가 남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기구속과 현실의 문제점에 비판적 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앙가주망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이 글에는 두 가지 다리가 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부동교)’와 나의 가는 다리(움직이는 다리)’가 그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는 분리된 두 곳을 연결해주는, 관계를 맺어주는 도구이다. 그러나 이 도구가 있다고 해도 사람이 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로 가는 데엔 사람의 다리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로 가는 것이다. 살아가려면 가는(가느다란) 다리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다리로 가야만 한다. 이에 관한 생각을 시인 박석준은 산다는 건 눈과 다리로 사람에게도 걸어간다는 것! 일까?”라고 생의 프리즈 절규에 표현했다.) 불로동, 부동교는 몸과 마음이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면서도 자신의 가는 다리5·18 광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있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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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밖 실화

  글 불로동, 부동교는 나(박석준)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된 것들(, 생각 등)을 시 형식으로 적은 실화이다. 불로동, 부동교는 광주에 있다.

  내가 첫 번째로 친구와 헤어질 때 본 눈은 196521학년 종업식 날 운동장에서 본 재선의 슬퍼하는 눈이다. 8년 후인 중학교 졸업식 때 본 현기슬퍼하는 눈은 내가 친구와 헤어질 때 두 번째로 본 슬퍼하는 눈이다. 나에게 이 눈은 함께 걸어가는 시간의 끝을 암시했, 내가 어른이 된 후에도 산다는 건 눈과 다리로 사람에게도 걸어간다는 것! 일까?”라는 삶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조숙한 현기는 찰스 브론슨과 알랭 들롱의 <레드 선> 등 외국영화를 보게 하거나 공원에 가게 하여 나에게 철없는 꼬마로 남아 있지 않게 한(어른으로 가는 데에 필요한 일을 알려준) 최초의 친구였다. 현기는 중1 때의 짝이었다.

그런데 내가 중2 때 아버지가 파산했다. 태섭은 부유한 집 아들이고 나의 짝인데, 내가 점심을 먹을 수 없어서 운동장에 나가 있는 사이에 내 책상 속에 튀김닭을 넣어놓기도 했다. 나는, 몸의 피폐함과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번민했지만, 결국 가난으로 인해 1973(중학교를 졸업한 16살 때)에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신문배달하여 돈을 버는 길을 선택했다. 19733월에 받은 월급 5천 원이 내가 번 최초의 돈이었다. 아버지가 이 돈을 받았는데 며칠 후 사라졌다.

  나는 번 돈으로 1975년에 진학했다. 하지만 곧 극빈자가 되어서 식구들이 술집의 창문 없는 뒷방으로 이사했다. 비좁아서 책상을 놓지 못하고 창문도 없어서 백열전등 아래 서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다가 19761월에 눈을 다쳤다. 1등을 계속했던 나는 눈이 흔들리고 흐릿하게 보일 뿐이어서 학년말고사에서 이름도 못 쓴 채 백지로 냈고, 3월에 휴학했다. 그리고 곧 식구들은 안채의 공부방으로 이사했다.

  (이것이 내 살아감의 첫 전환점이 되었다.)

  다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벽을 짚고 일어나도 두 걸음을 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나의 눈들에 통증이 심해져서 공부방 옆 마루로 기어가면 누나가 마루에서 책을 읽어주었다. 그러던 중에 여름에 정원에서 칸나가 시들고 이 방에서 나의 하나가 시들어버렸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에 수감된 형이 1975년에 풀려났고 모금운동을 하여 1976년 연말에 나를 수술시켜 살려냈다. 그러고는 자신은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수감되어 무기수가 됐다(이 해에 나는 광주의 전남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에 5·18 광주항쟁이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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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1-03-16 2021-03-26

불로동, 부동교*

 

 

  16살의 어린 시절 나는 처음으로 돈 버는 일을 해갔어.

  늙지 않는 동네에서. 3월 첫날부터.

  그런데 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는 가지 않았지.

  늙지 않는 동네의 한 2층 사무실에서

  나는 주소를 쓴 종이를 신문들에 둘러매 놓고

  잠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바라보다가 우체국으로 갔어.

  신문을 우송하려고 간 우체국에서 나오면

  나는 금남로를 건너갔어.

  궁동(宮洞) 길엔 그해 가을 한 오후부터는

  그 길에서 오후에 뜻밖에도 친구를 만나고 난 후로는

  신문을 돌리는 날에는 가지 않았지.

  그 애가 부유한 동네에서 산다는 것을

  잘사는 집 아이라는 것을

  그날 알았기 때문이었어.

  다음해 4월엔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이 수감되었어.

  나는 신문을 다 돌리면 다시 금남로를 향해 갔지.

  여름날 한 오후엔

  나에게만 조금 세게 부는 태풍 때문에

  금남로 길 위로 내가 날아갔어. 정말 무서웠어.

 

  내가 늙지 않는 동네로 다시 가기 시작한 건

  새로 사귄 친구 제영 때문이었어.

  우린 803월에 친구가 되었거든.

  5·18 광주항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건강해서 청년처럼 보이는 제영이

  계림동 우리 집에 찾아왔지.

  걱정되어 찾아왔다고 하곤 바로

  항쟁 기간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 왔어.

  불안하게 날을 보냈고 살아남아 죄스러웠다고

  말한 나는 23살이지만 20살 때처럼 허약한 소년이었어.

  나는 제영의 집에 찾아가려고

  늙지 않는 동네 길을 걸었어.

  때로 그 길 너머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눈길만 주었지.

  20살 소년을 의지하려고 사랑하려고

  찾아온 19살 소녀가 떠오르기도 했어.

  내가 20살인 5월의 휴일에 소녀의 첫사랑을 받았지만

  첫 데이트를 하려고 내가 가는 다리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건너서 간 건지는

  잘 생각 안 났지.

  나에게만 조금 세게 부는

  봄바람 같은 날이었는데. 내 생각엔.

 

  나는 32살 때도 18살 때처럼 허약한 소년이었어.

  몸도 마음도.

  사람들은 나를 32살 청년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전교조를 건설하고는 직권면직되어

  돈을 벌 수 있는 먼 곳에서 떠났지. 그해 814일에.

  다음해 3월 오후에 나는

  늙지 않는 동네 길을 걸어 18살의 소년처럼,

  가는 다리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섰지.

  사람들은 광주의 3·1운동은 1919310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 시작되었다고 했어.

  나는 곧 늙지 않는 동네,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내 소년을 숨겨뒀어.

  32814일 오후에, 항구도시에서

  나에게만 조금 세게 부는

  봄바람 같은 날에 내가 길을 걸었다고 생각이 흘러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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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로동(不老洞), 부동교(不動橋): 광주광역시에 있는 동네와 다리의 이름.

  * 궁동(宮洞): 광주광역시에 있는 동네와의 이름. 조선 선조의 정선옹주가 이곳에 출가하여 궁궐 같은 큰집에서 살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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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6 오후 6:09 2021-03-26() 오전 0:08 (초고) 페이스북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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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 1990-03. 41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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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①기욤 아폴니레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의 시.

  ②레오 페레(Léo Ferré. 1916-1993. 모나코 출신의 샹송 가수, 작사 작곡가)가 작곡하여 부른 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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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니레르

 

 

  난 다시 기억해야 하나

  기쁨은 늘 괴로움 뒤에 왔지

  밤이 오고

  종소리는 울리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지만 난 머물러 있네.

  서로 손잡고 얼굴을 마주 보면서

  우리들의 손잡고 가던 다리 아래로

  영원한 눈길에 지친 물결들이 저렇게 흘러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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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ont Mirabeau(미라보 다리) 레오 페레 (1953, 프랑스어)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GCP91oG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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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주시 불로동_Image

  광주시 불로동_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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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부동교_1989-cp0106-0044

  1989년 부동교_1989-cp0106-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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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목교로 되어 있는 부동교_Image

  1910년 목교로 되어 있는 부동교_Image_

    1950년대 부동교 모습. 1933년 가설되었다고 하며 과거 부동교아래에 작은 장터가 있었는데 1919310, 학생들을 비롯해 천 여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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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광주우체국

  1980년대 광주우체국

    1980년대 충장로2가 나라서적(예향198512월호)_584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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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우체국_2007080141949

  광주우체국_2007080141949

    충장로 광주우체국 앞을 `우다방으로 부르기 시작한 때는 대략 1970년대. 이후 광주시민들의 만남의 장소, 의사 소통 광장으로 매김해왔다. 우체국 차 있는 곳으로 올라가면 불로동 사무실이 나왔다.

  출처 : 광주드림(http://www.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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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관광호텔_2005-con054-0001

  광주관광호텔_2005-con05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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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궁동 예술의 거리(2013.7.7)

  광주시 궁동 예술의 거리(20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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