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43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
나의 무비즘 (41),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3), 사상시 (30)
2022-09-01 (현재) / 1995-07
박석준 /
<원작>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
형이 교도소에 9년 넘게 수감되었고
출감하여 거리에 나온 지 6년이 지났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형이 왜 나에게 화분을 가지고 따라오라 했는지.
37킬로 매우 가벼운 나는 어디도 가는지도 모르면서 왜
너무 무거운 25킬로 꽃 화분을 간신히 들고 가는지.
형이 (건물들이 높낮이로 그림을 그리며
차들 사람들이 이쪽저쪽으로 흘러가는 낮 유동 거리)
푸른 가로수들이 서 있는 인도를 걷다가 갑자기
만난 나보다 어린 청년에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봉투를 뜯어 삼십만 원
돈을 왜 다 주었는지.
점심때 내가 그 봉투에 넣어 어머니께 드린 용돈이
길에 봉투만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내 무게로 버틸 수 있는 한에서 일을 한다
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 가진 돈으로 사람 만난다
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광주교도소에서 오늘 출감했어요, 란 말을 들었고
그 청년은 청년인 나를 그냥 지나쳐 그 길을 걸었다.
형은 귀한 화분이니까 조심해라 했을 뿐이었다.
나는 3미터쯤 걷고는 화분을 내려놓곤 하였다.
나는 30분쯤 형의 뒤에서 걸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귀한 꽃나무여서 택시를 타지 않은 걸까? 나보다?
그 후, 그 청년은 어디론가 갔을 텐데,
어머니는 14년을 형은 22년을 세상에 살아서
5년 전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여름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산 세상은 아름다웠다.
사람은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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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오후 3:43 ⁓ 2022-12-23 오후 12:42 <원작 원고>
= 시집_『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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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995년 7월. 37kg.
2022-09-01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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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해석
1) 내용 파악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에는 4인이 등장하는데, ‘나 → 어머니’, ‘어머니 → 형’, ‘형 → 청년’의 형태로 3인이 “돈”을 주는 행위를 한다. 3인은 “돈”을 ‘타인에 대한 배려’의 표시 혹은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돈”을 중심으로 일이 벌어진다(인간관계를 실현한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이 글엔 아는 사람끼리의 배려를 “돈”으로 실현하였고 “꽃나무(화분)”로 실현하려는 것만 표현되었으니까.
이 글 속 상황에서 특별한 것은 사람의 관계이다. “형”과 “나”는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말(요청)을 하고 실행하는 행위를 한다. 그런데 “나”는 “형”의 의도(요청한 이유)를 알지도 못한 데다 “매우 가벼운 나는 어디도 가는지도 모르면서 왜 너무 무거운 25킬로 꽃 화분을 간신히 들고 가는지.”처럼 자신이 실행하는 이유도 모른다. 그리고 먼 후일 “사람은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돌아간다”라고 생각한다. 인생 혹은 세상사의 불확실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인생(혹은 세상사)의 본질을 탐구한 사상시이다.
한데 “나”는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실존의 근간을 “버틸 수 있는 내 무게(37킬로)”와 “가진 돈”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가진 돈이 많은지 적은지는 알 수 없으나, 내 몸은 “매우 가벼운” 것, 즉 ‘불안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안한 몸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사람은 그 몸으로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 자본주의 ‘사회여서 사람을 만나고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현대의 자본주의 체제 사람에겐 조금이라도 돈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나”의 애초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나”가 만난 사람 중 2인은 “교도소” 생활을 한 사람이다. 본인을 위한 일을 한 때문인지 타인을 위한 일을 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형”이 “청년”에게 돈을 준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되는 것이며, 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애초의 “나”의 생각을 무너뜨린 것이다. 사람은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 글엔 이렇게 실존주의가 깔려 있다.
‘사람은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므로 사람들이 만나서 상대방을 배려하여 뜻밖의 일을 하고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다, 그리고 그래서 지금은 여름이고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인생관이고 자연관이다. “꽃나무(화분)”는 ‘타인을 지향하는 물건’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표시하는 물건’이어서, 때로 사람에겐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된다.
이 작품은 “꽃나무(화분)”와 “37킬로(내 무게)”, “돈”이 중요 소재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실린 시집엔 이외에도 3개의 작품에 “꽃나무”라는 어휘가 나온다. ―
①“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나는/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쏟겠다.”(「서시 (시인의 말)」),
②“꽃나무는/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어서,”(「2022년에 온 월상석영도」),
③“(어머니는) 꽃나무 화분들에 손길을 주고 있을 뿐.”, “혼자서 공존을 도모하고 나는 꽃나무 화분들을 챙겨/광주 유동 박제방을 떠났다.”(「광주 유동 박제방」).
①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나무이며 그 꽃으로 사람에게 자극을 주는 나무’이다. ②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③은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들)/아들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들)’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데 “37킬로 매우 가벼운 나는 어디도 가는지도 모르면서 왜/너무 무거운 25킬로 꽃 화분을 간신히 들고 가는지.”, “귀한 꽃나무여서 …?”라는 표현 속에 있는 이 글의 “꽃나무”는 ‘형에게는 ①의 의미를 지닌 것이지만, 나에게는 세상살이 사람살이를 해가려는데 나를 어렵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37킬로는 이런 ‘나의 어려움’을 독자가 쉽게 그려볼 수 있도록 시각화한 표현이다.
“37킬로”는 자서전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에 수록된 「유동 뷰티」에도 표현되었다. 이 글에서는 1996년의 “나”의 무게이고 「유동 뷰티」에서는 그 1년 후인 1996년(39살 때)의 “나”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 “어머니”가 등장하고 ‘돈’이 중심 사건을 흘려낸다. 이런 면을 참고할 때 이 글은 시인 박석준에게 실제로 스쳐간 일들과 그때의 생각을 시 형식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왜 시인은 38살에 37킬로라는 매우 허약하고 비정상적인 자신의 몸 상태를 보여준 것일까? 이것은 자신이 당시에 ‘세상살이 사람살이’를 하기 어려웠음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37이라는 숫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2) 기법
이 글은 마지막 문장 “돌아가므로”와 “형이 교도소에 9년 넘게 수감되었고…”라는 첫 문장이 연결되는 순환형 구성 형식을 취함으로써 “사람은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돌아간다” 말을 보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환형 구성이 아방가르드 경향을 낳는다.
‘도치문+열거’(알 수 없었다/ 왜 -는지, -는지, -는지)의 표현이 있으며, *역설로 볼 수 있는 표현(길을 지나간 까닭에/지금은 여름이고)이 있으며, *동일문장 구조의 변형(나는 ⁓ 는 생각이었다) 표현이 있고, ()를 사용하여 상황을 섬세하게 만들거나 글을 순환시키고 있다. 이 글에는 사람들의 행위와 관계, 사정을 주로 시각적인 심상으로 형상화하면서 시공간을 이동하여 표현하는 무비즘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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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밖 실화
이 글은 1995년 7월에 광주 유동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과 사정, 나의 생각과, 2022년 9월 1일에 일어난 나의 생각을 그대로 재현하여 시 형식으로 쓴 것이다.(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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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2-09-30-화순. 166564422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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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화순. (나, 제영, 재남, 오철) 1665644242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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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중학교. 1995. img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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