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63 쇼윈도 세상에서
나의 상징주의 (5), 이미지즘 (4), 실존주의 앙가주망 (40), 아방가르드 (8), 나의 무비즘 (55)
2003-06-12
박석준 /
<원작 원고>
쇼윈도 세상에서
컴퓨터를 끄고 퇴근한 나는 손 만나는 거리로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말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빗물에 떠 만들어지는 마블링,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물러 버린 어느 가수의 미완의 음성
―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따위가 새로운 간판 볼 때처럼 잠시 손 생각 잊게 했다.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대,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다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바라며
아름다운 새벽을 바라며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뒤따라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인사를 나누고
유리창 가에 서, 내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 학생이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가고자 하는 나는 석양빛
쏟아지는 쇼윈도 앞에서 사람 사이의 말소리를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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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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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2 ∼ 2014.03.24. 15:32. 카페 가난한 비_2. 문병란 선생님(시인)께 (오타 ‘버물러’/문장부호 탈자 ‘한다 ’) <원작 원본>
― https://cafe.daum.net/poorrain/Ewta/132
= 2014.03.25. 09:26. 카페 가난한 비_문병란 선생님(시인)께
― https://cafe.daum.net/poorrain/FB7E/55
=→ 2014-07-08 오후 7:12. 박석준_-_쇼윈도_세상에서_(2편).hwp (원작 교정: 오인한 오타 정정 ‘버무려’ + .표 삽입 ‘한다.’)
↛ 시집(2016.12.02. 문학들) (오편집 ‘따위가/따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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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2003-06-12. 광주시 유동 송원백화점 부근
2014-03-24. 광주시 유동 (첨가: 스마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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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해설
쇼윈도 거리를 걷는 현대의 햄릿 - ①
시집 말미에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붙게 될 이 글이 맡아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해석’과 ‘해설’이 서로 서로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단어’ 차원(단어의 다름)에서 이야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오는 이 시집이 ‘분단’이라는 세계에, 더 나아가 우리 삶에 자신의 자리를 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어떤 부끄러움, 어떤 ‘멈춤’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시일수록, ‘해설’의 역할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시가 스스로 정당화될 때 해설은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박석준의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라는 표제를 단 이 시집에 부치는 ‘해설’의 자리에 이러한 말들이 필요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시들의 의미적 선명도가 비교적 높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시는 멜랑콜리의 정서, 다시 말해 고독, 소외, 상실, 피로, 허무, 우울, 환멸 등의 감정들로 교직되어 있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의 말과 진실의 관계, 사람 사이의 단절과 소통의 어려움, 현 시국에 대한 불안과 안타까움, 그리고 교육자―박석준 시인은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았다고 한다―로서 겪은 현장의 경험 등이 그 면면을 이루고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물론 그의 시를 읽는 경험은 전체적인 의미의 선명도와는 별개로, 어쩌면 ‘곤혹스러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다음 시를 보자.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대,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다.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 「쇼윈도 세상에서」 부분
박석준의 시집에서 이와 같은 문장들을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시의 의미가 말하기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타당한 전제를 상기한다면, 이를테면 “키가 빈틈없이 크다”와 같은 표현은 정서의 차원에서 선명한 박석준 시의 ‘의미적 선명도’에 대해 다시 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그 ‘결’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잇노라면 쉽게 잡히지 않는, 즉 ‘현기증 유발 구간’과 조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앞서 언급한 멜랑콜리의 정서, 그것을 형성한 여러 감정들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멜랑콜리는 극도의 정신적 긴장에서 내면을 향해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유발되는 것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이 발명된 근대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랑콜리는 근대적 주체가 맞게 된 고통과 방향 상실, 그리고 심리적 공황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예술가의 스타일’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석준의 시는 그러한 멜랑콜리의 정서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 등에 작은 균열을 낸다. 특히 (문제가 많은)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존재는 인식의 국면에 그와 같은 ‘균열’을 도입할 수 있느냐 여부와 관계된다. 애초에 ‘현대’ 예술의 조건을 논할 때 ‘새로움’이 운위되는 것 자체부터가 그러한 이유 때문이지 않은가. 물론 그와 같은 균열들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수 있다. 본 해설이 담당해야 할 과제는 그러한 경험이 왜 가치 있는지, 동시에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피력하는 데 있다. 이는 박석준의 시가 단순히 ‘우울증’은 아니라는 점과 함께 간다.
손택(Sontag)은 멜랑콜리에서 ‘매력’이 상실된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말한다. 박석준 시의 매력은 시 자체가 바로 그러한 균열의 모습을 닮았다는 데 있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쇼윈도”는 말 그대로 ‘보여주는(show) 창문(window)’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컴퓨터 운영체제로 잘 알려진 ‘윈도우즈 (windows)’ 역시 ‘창문’이다. 통상 창문이 집 안에서 바깥은 보는 매개(소통)로서 존재한다면, 쇼윈도와 컴퓨터의 ‘창’은 과연 무엇을 매개하는 것일까. 창문처럼 바람과 빗물, 찬란한 햇빛으로 바깥과 안을 연결함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가. 화자가 쇼윈도 안의 “마네킹” 앞에서 혼잣말을 하다 (‘불통’의 상징인) “바벨탑”을 떠올리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소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컴퓨터 모니터에 뜨는 수많은 창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의심을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지 않다’고, 그러한 소통에 ‘어떤 위화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위 시의 ‘창문’은 ‘닫힌 창문’, 벽처럼 시야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보는 사람이 기만당할 수 있는 ‘창문 아닌 창문’인 것이다. 박석준은 그러한 소외 의식을 ‘매끄럽지 않은’ 문장을 통해 형상화한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문장 스타일이 그와 같은 소외 의식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 김청우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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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객관적 해석
4월을 며칠 앞두고 보내준 회심의 쾌작 속에서 나도 박 시인의 근황을 입체적으로 느끼고 있소. 마치 1920년대 1차대전이 끝난 어느 날 런던교 위에 서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허하고 황무한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던 T.S Eliot의 「황무지」 그것처럼 무척 황량해 보이는, 이 봄의 눈부신 춘색(春色)과는 어울리지 않는 박석준 시인의 그 마음을 전해 받았소.
손 만나는 거리, 의미 없이 흘러가는 군중 속에서 붙잡을 손을 만나지 못하고 쇼윈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네킹(木乃伊) 앞에 서 있는 어쩌면 쓸쓸한 모습. 그날의 T.S Eliot과 같은 황량한 마음을 지닌 박석준의 독백 앞에 서게 되오. 「가족이 없고 앎과 가진 것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고 대접받아 ‘추해지는 나’가 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부르면 그냥 따라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논의에서 제외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섹스 한 번 못 할 사람’으로 생각합니다」(편지글에서) 이 俗惡(속악)한 시대에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못하고 극심한 소외와 고독 그리고 심한 自意識(자의식)에 시달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오. 헌데, 이 3가지의 편견이나 속물근성의 속중 속에 조진태, 김민휴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까지 포함하여 시쓴다는 ‘우리들’까지 편견과 오류로 그의 소외와 고독을 어쩌지 못하는가? 이런 회의와 함께 펜이 망설임에 멈추게 되오. 「그런 경우에 이르면 ‘나는 이 자리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내가 사람이 그리워서 섣불리 사람을 만나러 간 데서 이루어진 잘못된 관계라고 생각하며 근원적으로는 나의 쓸데없는 욕망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편지글)
내 자신 늘 겪었던 소외와 고독 자의식의 반추이기에 박석준의 소외와 고독 그 자의식이 바로 내 것인 양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 심각한 고독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편지(시와 산문이)가 조금은 약발 없는 맹탕이 아닐까 걱정도 해보오. 「‘나에게 홀대를 하거나 외면을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행위가 ‘안 만나는 것’인지 모릅니다.(편지글)」 이에 대한 나의 처방이 있을까. 잠시 펜을 놓고 박석준의 그 고독과 시를 생각해 보오. 의식분열, 회의, 망설임 심각한 염인증(?) 더 진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는 박시인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다음 글을 마작 읽기로 하였소.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니지만 박석준 시인같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현실이라는 속악한 인정의 벽 앞에서 소외와 고독, 어떤 좌절감 허무감을 만나기는 너무나 흔하다고 생각되오. 내 자신 수백 번 겪어온 망설임과 고독과 허무의 반복이라 여기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부조리’라 치유하기 어려운 20세기의 ‘새로운 병’처럼 생각했던 것이오.
자기의 능력만큼 이 시대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궁극적인 해결책은 ‘자의식을 벽을 깨고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앙가지망하는 것’이오.
나와의 만남, 시가 아니라도 이 속악한 현실을 헤치고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용기를 내서 자신을 우선 극복하는 시로써 교단과 문단 그리고 학생(제자)과 동료(시인, 교사 특히 전교조의 동지들)들과의 적극적인 자세로써 (시를 통해) 스스로 자의식의 어둠을 뚫고 나오기 바라오.
싸우면서 크는 아이들, 교사가 만능일 수도 없고 성자도 아니기에 일일이 다 자책하지 말고 대범할 수 있다면 부질없는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것이오. 처방 아닌 장광설로서 그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는지 망설여지지만 그 삶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 어느 시인에게서도 흔한 자세는 아니오. 진실하고자 하기에 그런 고뇌로써 자기단속에 철저한 것 아니오? 더욱더 신뢰와 응원 보내오. 이 아름다운 봄날 행복할 일을 스스로 찾아내기 비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멈추오.
― 2014년 3월 30일. 문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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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정) 『푸른사상』 ‘― 표 삭제’) 2014
쇼윈도 세상에서
컴퓨터를 끄고 퇴근한 나는 손 만나는 거리로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말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빗물에 떠 만들어지는 마블링,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무려버린 어느 가수의 미완의 음성
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따위가 새로운 간판 볼 때처럼 잠시 손 생각 잊게 했다.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대,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다.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바라며
아름다운 새벽을 바라며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뒤따라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인사를 나누고
유리창 가에 서, 내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 학생이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가고자 하는 나는 석양빛
쏟아지는 쇼윈도 앞에서 사람 사이의 말소리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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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정 ‘― 표 삭제’) 『푸른사상』 2014 가을호/vol.20 (2014.09.30.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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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편집)_시집 (따위가/따위로) 2013
쇼윈도 세상에서
컴퓨터를 끄고 퇴근한 나는 손 만나는 거리로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말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빗물에 떠 만들어지는 마블링,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무려 버린 어느 가수의 미완의 음성
― 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따위가 새로운 간판 볼 때처럼 잠시 손 생각 잊게 했다.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대,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다.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바라며
아름다운 새벽을 바라며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뒤따라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인사를 나누고
유리창 가에 서, 내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 학생이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가고자 하는 나는 석양빛
쏟아지는 쇼윈도 앞에서 사람 사이의 말소리를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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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2 ∼ 2014.03.24. (오타 ‘버물러’/문장부호 탈자 ‘한다 ’) <원작>
=→ 2014-07-08 오후 7:12. 박석준_-_쇼윈도_세상에서_(2편).hwp (원작 교정: 오인한 오타 정정 ‘버무려’ + .표 삽입 ‘한다.’)
↛ (오편집 ‘따위가/따위로’) 시집_『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2016.12.02. 문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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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03-06-12
쇼윈도 세상에서
거리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나는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발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물러 버린 미완의 어느 가수의 음성―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마네킹은 이국의 모습으로, 코가 뾰족하고 키가 빈틈없이 컸다. 바벨탑이 근처에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끔 그 가게 앞에 서성였을 때 했건만, 오늘도 비루한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는 것에 결론이 이르렀다.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받으러 아름다운 새벽이 늙어 가는 기운을 바라보고자 찾아 왔었다. 다음 학생이 강의실에 들어와 유리창 가로 섰을 때, 내가 시내를 바라보듯 그 사람도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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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2. 00:46. 카페 가난한 비_쇼윈도 세상에서) (초고 원본)
→ https://cafe.daum.net/poorrain/F1vW/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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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복 입은 남자마네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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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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