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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무비즘 (58),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12), 상징주의 (8), 이미지즘 (5) 쇼윈도 세상에서 / 박석준

나의 신시 65 쇼윈도 세상에서

나의 무비즘 (58),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12), 상징주의 (8), 이미지즘 (5)

2003-06-12

박석준 /

<원작 원고>__(버물러/스마트폰(2014-03-24. 첨가))

쇼윈도 세상에서

 

 

  컴퓨터를 끄고 퇴근한 나는 손 만나는 거리로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말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빗물에 떠 만들어지는 마블링,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물러 버린 어느 가수의 미완의 음성

  ―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따위가 새로운 간판 볼 때처럼 잠시 손 생각 잊게 했다.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다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바라며

  아름다운 새벽을 바라며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뒤따라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인사를 나누고

  유리창 가에 서, 내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 학생이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가고자 하는 나는 석양빛

  쏟아지는 쇼윈도 앞에서 사람 사이의 말소리를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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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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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2 2014.03.24. 15:32. 카페 가난한 비_2. 문병란 선생님(시인)(오타 버물’/문장부호 탈자 ’/‘스마트폰첨가) <원작 원본>

https://cafe.daum.net/poorrain/Ewta/132

= 2014.03.25. 09:26. 카페 가난한 비_문병란 선생님(시인)

https://cafe.daum.net/poorrain/FB7E/55

=2014-07-08 오후 7:12. 박석준_-_쇼윈도_세상에서_(2).hwp (원작 교정: 오인한 오타 정정 무려’ + .표 삽입 한다.’)

시집(2016.12.02. 문학들) (오편집 위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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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2003-06-12. 광주시 유동 근처 신안동 송원백화점 부근

    2014-03-24. 광주시 유동 (첨가: 스마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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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쇼윈도 거리를 걷는 현대의 햄릿 -

 

  시집 말미에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붙게 될 이 글이 맡아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해석해설이 서로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단어차원(단어의 다름)에서 이야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오는 이 시집이 분단이라는 세계에, 더 나아가 우리 삶에 자신의 자리를 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어떤 부끄러움, 어떤 멈춤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시일수록, ‘해설의 역할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시가 스스로 정당화될 때 해설은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박석준의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라는 표제를 단 이 시집에 부치는 해설의 자리에 이러한 말들이 필요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시들의 의미적 선명도가 비교적 높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시는 멜랑콜리의 정서, 다시 말해 고독, 소외, 상실, 피로, 허무, 우울, 환멸 등의 감정들로 교직되어 있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의 말과 진실의 관계, 사람 사이의 단절과 소통의 어려움, 현 시국에 대한 불안과 안타까움, 그리고 교육자박석준 시인은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았다고 한다로서 겪은 현장의 경험 등이 그 면면을 이루고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물론 그의 시를 읽는 경험은 전체적인 의미의 선명도와는 별개로, 어쩌면 곤혹스러운경험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다음 시를 보자.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 「쇼윈도 세상에서부분

 

  박석준의 시집에서 이와 같은 문장들을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시의 의미가 말하기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타당한 전제를 상기한다면, 이를테면 키가 빈틈없이 크다와 같은 표현은 정서의 차원에서 선명한 박석준 시의 의미적 선명도에 대해 다시 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쉽게 잡히지 않는, 현기증 유발 구간과 조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앞서 언급한 멜랑콜리의 정서, 그것을 형성한 여러 감정들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멜랑콜리는 극도의 정신적 긴장에서 내면을 향해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유발되는 것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이 발명된 근대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랑콜리는 근대적 주체가 맞게 된 고통과 방향 상실, 그리고 심리적 공황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예술가의 스타일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석준의 시는 그러한 멜랑콜리정서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 등에 작은 균열을 낸다. 특히 (문제가 많은)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존재는 인식의 국면에 그와 같은 균열을 도입할 수 있느냐 여부와 관계된다. 애초에 현대예술의 조건을 논할 때 새로움이 운위되는 것 자체부터가 그러한 이유 때문이지 않은가. 물론 그와 같은 균열들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수 있다. 본 해설이 담당해야 할 과제는 그러한 경험이 왜 가치 있는지, 동시에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피력하는 데 있다. 이는 박석준의 시가 단순히 우울증은 아니라는 점과 함께 간다.

  손택(Sontag)은 멜랑콜리에서 매력이 상실된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말한다. 박석준 시의 매력은 시 자체가 바로 그러한 균열의 모습을 닮았다는 데 있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쇼윈도는 말 그대로 보여주는(show) 창문(window)’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컴퓨터 운영체제로 잘 알려진 윈도우즈 (windows)’ 역시 창문이다. 통상 창문이 집 안에서 바깥은 보는 매개(소통)로서 존재한다면, 쇼윈도와 컴퓨터의 은 과연 무엇을 매개하는 것일까. 창문처럼 바람과 빗물, 찬란한 햇빛으로 바깥과 안을 연결함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화자가 쇼윈도 안의 마네킹앞에서 혼잣말을 하다 (‘불통의 상징인) “바벨탑을 떠올리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소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컴퓨터 모니터에 뜨는 수많은 창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의심을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지 않다, 그러한 소통에 어떤 위화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위 시의 창문닫힌 창문’, 벽처럼 시야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보는 사람이 기만당할 수 있는 창문 아닌 창문인 것이다. 박석준은 그러한 소외 의식매끄럽지 않은문장을 통해 형상화한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문장 스타일이 그와 같은 소외 의식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 김청우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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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 해석

  4월을 며칠 앞두고 보내준 회심의 쾌작 속에서 나도 박 시인의 근황을 입체적으로 느끼고 있소. 마치 1920년대 1차대전이 끝난 어느 날 런던교 위에 서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허하고 황무한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던 T.S Eliot황무지그것처럼 무척 황량해 보이는, 이 봄의 눈부신 춘색(春色)과는 어울리지 않는 박석준 시인의 그 마음을 전해 받았소.

  손 만나는 거리, 의미 없이 흘러가는 군중 속에서 붙잡을 손을 만나지 못하고 쇼윈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네킹(木乃伊) 앞에 서 있는 어쩌면 쓸쓸한 모습. 그날의 T.S Eliot과 같은 황량한 마음을 지닌 박석준의 독백 앞에 서게 되오. 가족이 없고 앎과 가진 것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고 대접받아 추해지는 나가 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부르면 그냥 따라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논의에서 제외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섹스 한 번 못 할 사람으로 생각합니다(편지글에서) 俗惡(속악)한 시대에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못하고 극심한 소외와 고독 그리고 심한 自意識(자의식)에 시달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오. 헌데, 3가지의 편견이나 속물근성의 속중 속에 조진태, 김민휴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까지 포함하여 시쓴다는 우리들까지 편견과 오류로 그의 소외와 고독을 어쩌지 못하는가? 이런 회의와 함께 펜이 망설임에 멈추게 되오. 그런 경우에 이르면 나는 이 자리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내가 사람이 그리워서 섣불리 사람을 만나러 간 데서 이루어진 잘못된 관계라고 생각하며 근원적으로는 나의 쓸데없는 욕망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편지글)

  내 자신 늘 겪었던 소외고독 자의식의 반추이기에 박석준의 소외와 고독 그 자의식이 바로 내 것인 양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 심각한 고독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편지(시와 산문이)가 조금은 약발 없는 맹탕이 아닐까 걱정도 해보오. 나에게 홀대를 하거나 외면을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행위가 안 만나는 것인지 모릅니다.(편지글)이에 대한 나의 처방이 있을까. 잠시 펜을 놓고 박석준의 그 고독과 시를 생각해 보오. 의식분열, 회의, 망설임 심각한 염인증(?) 더 진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는 박시인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다음 글을 마작 읽기로 하였소.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니지만 박석준 시인같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현실이라는 속악한 인정의 벽 앞에서 소외와 고독, 어떤 좌절감 허무감을 만나기는 너무나 흔하다고 생각되오. 내 자신 수백 번 겪어온 망설임과 고독과 허무의 반복이라 여기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부조리라 치유하기 어려운 20세기의 새로운 병처럼 생각했던 것이오.

  자기의 능력만큼 이 시대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궁극적인 해결책은 자의식을 벽을 깨고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앙가주망하는 것이오.

  나와의 만남, 시가 아니라도 이 속악한 현실을 헤치고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용기를 내서 자신을 우선 극복하는 시로써 교단과 문단 그리고 학생(제자)과 동료(시인, 교사 특히 전교조의 동지들)들과의 적극적인 자세로써 (시를 통해) 스스로 자의식의 어둠을 뚫고 나오기 바라오.

  싸우면서 크는 아이들, 교사가 만능일 수도 없고 성자도 아니기에 일일이 다 자책하지 말고 대범할 수 있다면 부질없는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것이오. 처방 아닌 장광설로서 그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는지 망설여지지만 그 삶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 어느 시인에게서도 흔한 자세는 아니오. 진실하고자 하기에 그런 고뇌로써 자기단속에 철저한 것 아니오? 더욱더 신뢰와 응원 보내오. 이 아름다운 봄날 행복할 일을 스스로 찾아내기 비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멈추오.

2014330. 문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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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달언어 ; 음악성 강조 ; evocative language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언어 사용의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존재했던 언어의 의미 전달능력에 대한 믿음이 19세기 중만 무렵부터 붕괴되면서,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logopoeia)보다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언어(phanopoeia)와 시어가 갖는 리듬 등의 음악성을 강조한 언어(melopoeia)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 대표적 운동으로 상징주의와 이미지즘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영미계의 대표시인으로서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엘리어트(T.S. Elio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의미언어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란, 언어는 곧 절대적 의미전달자라는 전통적 확신의 파기에서 초래된 것이다. 이는 철학, 역사학, 과학, 심리학 등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발견으로써 인간에 대한 관점 자체를 전환시컸던 19세기 말엽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전적으로 의미언어를 배제하기보다는, 언어의 음악성과 이마지를 강조하면서도 신화나 전설, 기존 작품에 대한 암시적 언급 등을 통해, 이성중심의 역사가 배척함으로써 소외시킨 언어의 영역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서는 음악성이나 이미지란 것도 그것이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한에서 유의미한 것이었고, 형이상학파 시인들에 관한 글에서 사상을 장미 향기처럼 전달하는 것이 진정한 시인이라 했듯, 그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한 의미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하려고 했던 시인이다. 엘리어트가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초기시에서 주로 사용한 언어는 전통적인 묘사적 언어(descriptive language)보다는 황무지(The Waste Land, 1922)에서 보이듯 이미지와 상징, 음악성 등을 강조한 불러일으키는 언어(evocative suggestivelanguage)"이다.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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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정) 푸른사상표 삭제’) 2014

쇼윈도 세상에서

 

 

  컴퓨터를 끄고 퇴근한 나는 손 만나는 거리로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말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빗물에 떠 만들어지는 마블링,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무려린 어느 가수의 미완의 음성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따위가 새로운 간판 볼 때처럼 잠시 손 생각 잊게 했다.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따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바라며

  아름다운 새벽을 바라며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뒤따라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인사를 나누고

  유리창 가에 서, 내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 학생이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가고자 하는 나는 석양빛

  쏟아지는 쇼윈도 앞에서 사람 사이의 말소리를 그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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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정 표 삭제’) 푸른사상2014 가을호/vol.20 (2014.09.30.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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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편집)_시집 (위가/위로) 2013

쇼윈도 세상에서

 

 

  컴퓨터를 끄고 퇴근한 나는 손 만나는 거리로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말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빗물에 떠 만들어지는 마블링,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무려 버린 어느 가수의 미완의 음성

  ― 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위가 새로운 간판 볼 때처럼 잠시 손 생각 잊게 했다.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코가 뾰족하다, 스마트폰, 컴퓨터 윈도우에서와는 다른 모델,

  키가 빈틈없이 크다, 늘씬한 10, 그렇지 날렵한 바벨탑

  그거다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

위로 느낌을 번지게 하더니 마네킹은

  잠시 잊고 만 손을 떠올리게 한.

  그 가게 앞에,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바라며

  아름다운 새벽을 바라며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뒤따라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인사를 나누고

  유리창 가에 서, 내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그 학생이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가고자 하는 나는 석양빛

  쏟아지는 쇼윈도 앞에서 사람 사이의 말소리를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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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2 2014.03.24. (오타 버물’/문장부호 탈자 ’) <원작>

=2014-07-08 오후 7:12. 박석준_-_쇼윈도_세상에서_(2).hwp (원작 교정: 오인한 오타 정정 무려’ + .표 삽입 한다.’)

(오편집 위가/위로’) 시집_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2016.12.02. 문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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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03-06-12

쇼윈도 세상에서

 

 

  거리를 떠나 손이 있는 데로 나는 가고자 했다. 간판의 이름들이 삶의 기억으로 회수되고 발소리는 노크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반신반의였던 건데. 어렸을 때 빗속으로 빠져가던 소년, 솔의 리듬으로 클랙슨에 버물러 버린 미완의 어느 가수의 음성내 뒤를 밟는 소리, 어서 오라. 따뜻한 음성으로.

 

  나는 가슴에 한국 옷을 입은 마네킹 앞에 섰다. 마네킹은 이국의 모습으로, 코가 뾰족하고 키가 빈틈없이 컸다. 바벨탑이 근처에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끔 그 가게 앞에 서성였을 때 했건만, 오늘도 비루한 인간의 소리를 모른다는 것에 결론이 이르렀다. 쇼윈도 세상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하루, 즐거운 햇빛을 받으러 아름다운 새벽이 늙어 가는 기운을 바라보고자 찾아 왔었다. 다음 학생이 강의실에 들어와 유리창 가로 섰을 때, 내가 시내를 바라보듯 그 사람도 햇빛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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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2. 00:46. 카페 가난한 비_쇼윈도 세상에서) (초고 원본)

https://cafe.daum.net/poorrain/F1vW/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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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프랑스어: avant-garde, 영어: advanced guard) 또는 전위 예술(前衛藝術)은 예술, 문화, 사회에 대한 실험적급진적비전통적인 작업과 작가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종종 미적인 혁신과 생경한 거부감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실존주의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 어떤 유파(流波)나 기성의 관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 했던 입체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의 예술 행위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 특성은 모호성·불확실의 역설과 주체의 붕괴, 비인간화를 들 수 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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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사르트르(J.P. Sartre)는 아방가르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아방가르드는 그가 창조해낸 것보다는 그가 거부한 것에 의해 더욱 잘 정의내릴 수 있다.예술가들이 그릇된 구조를 갱신하기 위해 채택한 전위적 전략은 다름 아닌 폭로였다. 소외·폭력·억압으로 대표되는 위선적인 구조에 대해서 그것의 폐해와 그늘을 모조리 까발리는 것으로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구호만으로 창조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진부한 위선과 소외, 폭력, 그리고 억압과 부정직한 결탁을 거부하는 것(실천)에 의해서만 비로소 순수성과 선명성이 드러나는 이유이다.

작가 주변의 일상적 삶이 정치·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상징화의 이미지를 통해 논리적 메시지를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가운데 자신의 진솔한 삶을 투영한다.

[매일춘추] 팝아트와 문화 팝

https://www.imaeil.com/page/view/201001220729022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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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석준_ 목포_ 2003-12-15

  박석준_목포_ 200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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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4167937DC7D5

  2D4167937DC7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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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49_70923_188  한복 입은 남자여자마네킹

  70649_70923_188 한복 입은 남자여자마네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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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wer of Babel by Pieter Bruegel the Elder (1563)

  바벨탑. The Tower of Babel by Pieter Bruegel the Elder (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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