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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무비즘 (95), 실존주의 모더니즘 (42) 호스피스 나뭇잎_(문학마당_카페 버전) / 박석준

나의 신시 107-1 호스피스 나뭇잎_(문학마당_카페 버전)

나의 무비즘 (95), 실존주의 모더니즘 (42)

2008-03-23 (일)

박석준 /

<문학마당 요약 버전2012-12-11 109-1 (씁쓸해져)

호스피스 나뭇잎

 

 

  어머니는 아직 호스피스 병동 휴식실에 있다.

  어머니는 목을 뚫어 꽂은 관을 통해

  가래를 걸러내고 있다. 가까이에선

  진하게 보이는 어떤 사정과 말 못하는 사람을

  휠체어에 매달고 있는 호스피스 휴식실은

  나뭇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낮 열두 시,

  5분쯤 더 있다가 휠체어는 병실로 가야 한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줄어들어

  인형에 불과한 사람, 그 사람 곁에

  나는 한 사람으로 가 있어야 한다.

  3월 낮 따뜻한 햇살이 두 사람의 말 없는

  장면으로만 남아버려 씁쓸해져 쓸쓸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늘 어떤 존재들을 위한

  부스러기로 있는 까닭에 그걸 외로움이라고

  말할 힘도 없다. 창밖 나뭇잎은 거리로

  떨어져 내렸지만 호스피스 휴식실의 나뭇잎은

  탈색조차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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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23:24.메. 호스피스 나뭇잎.hwp <원작 요약 버전>

= 『문학마당』 41호/2012 겨울호 (201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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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시 107-2

<문학마당 요약 버전을 교정한 시집 버전> (씁쓸하고)

호스피스 나뭇잎

 

 

  어머니는 아직 호스피스 병동 휴식실에 있다.

  어머니는 목을 뚫어 꽂은 관을 통해

  가래를 걸러내고 있다. 가까이에선

  진하게 보이는 어떤 사정과 말 못하는 사람을

  휠체어에 매달고 있는 호스피스 휴식실은

  나뭇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낮 열두 시,

  5분쯤 더 있다가 휠체어는 병실로 가야 한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줄어들어

  인형에 불과한 사람, 그 사람 곁에

  나는 한 사람으로 가 있어야 한다.

  3월 낮 따뜻한 햇살이 두 사람의 말 없는

  장면으로만 남아버려 씁쓸하고 쓸쓸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늘 어떤 존재들을 위한

  부스러기로 있는 까닭에 그걸 외로움이라고

  말할 힘도 없다. 창밖 나뭇잎은 거리로

  떨어져 내렸지만 호스피스 휴식실의 나뭇잎은

  탈색조차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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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요약 버전2012-12-11 (씁쓸해져)

↛ 2013-01-06 오전 6:01.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3년1월5일-2(내가 모퉁이로 사라졌다가).hwp <편집자가 임의 교정씁쓸하고>

시집_『카페, 가난한 비』(2013.02.12. 푸른사상)

(씁쓸하고: 동시상황/씁쓸해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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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2008-03-23 (일). 광주 기독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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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쏟겠다.

  글 「호스피스 나뭇잎」은 2008년 3월에 나에게 실제로 펼쳐진 일과 그 일로 인한 나의 상념을 털어내어 시 형식으로 형상화한 실화이다. 나(박석준)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호스피스 나뭇잎’이라는 제목으로 <원작 = 석사학위 버전>을 2008년 9월에 완성하고 『석사학위 작품집』에 수록했다. 4년 후인 2012년 12월엔 <원작>의 요약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수정개작 「호스피스 나뭇잎」<문학마당 요약 버전>을 써서 『문학마당』에 발표했다. 그리고 <문학마당 요약 버전>을 첫 시집에 수록하려고 출판사에 보냈는데, 출판사에서 임의 교정하여 출판사 버전의 「호스피스 나뭇잎」<카페 버전>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하여 「호스피스 나뭇잎」은 3가지의 버전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3가지의 버전은 모두 사람을 따라 시공간이 이동하여 장면을 만들어내는 무비즘 기법이 사용되었다.

  <원작>에는 “돈과 삶에 여유가 생기면/어색한 얼굴과 어색한 목소리는 다 없어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본주의 체제 사회의 맘모니즘에 대한 앙가주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글과 유사한 상황이 나의 「언덕의 아이」라는 글에도 펼쳐진다.

 

    그런 뒤, 30년쯤 흐르는 사이에 우쩍 커져버린 도시를

    도시의 아스라한 끝을 보았던 것인데…….

    지금은 언덕에 세워진 병원 창밖을 내다보고 있지,

    한 사람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4층 호스피스 병실

    작은 나무 둘레를 왔다 갔다 하다가.

    창밖에는 무슨 나무인지 나무가 자라고 있고

    한두 달 후면 봄이 올 텐데, 오후가 있고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지.

― 「언덕의 아이」 끝 부분

 

  「언덕의 아이」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2008년 3월로 살아와 광주기독병원 4층 호스피스 휴식실에 있는 나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나는 이처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시적 형식으로 표현한 글이 매우 많다. 그 이유는, ‘예쁘고 귀한 꽃나무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해도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진한 마음을 쏟아야 하고, 이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는 다루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언덕의 아이」, 「호스피스 나뭇잎」에 흐르는 씁쓸한, 슬픈 정경에서 멜랑콜리를 느낄 수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들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실존주의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씁쓸해져 쓸쓸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꽤 있는데, 그 과정은 ‘씁쓸해진’ 후에 ‘쓸쓸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씁쓸하고 쓸쓸해지는”이라고 수정한 것이 시집에 실렸다. “씁쓸하고 쓸쓸해지는”은 두 가지 감정의 상태가 동시에 발생했음으로 여겨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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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문학마당 요약 버전>에 대한 평론

  이 시는 첫 줄에서 모든 상황을 다 말해버린다. 어머니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호스피스 병동의 중환자다. 이런 위독한 상황을 만난 지 꽤 오래된 듯 “아직”이라는 부사어에서 간병하는 가족들의 지친 모습이 진하게 배어 있다. 소생의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간병이란 말은 왠지 어색하다. 간병(看病)이란 말에는 치유를 기다리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자[病]를 지켜본다[看]는 말 속에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로 하기에 힘들지만 어둡지는 않다. 그러나 그 간병이 호스피스 병동에서라면 달라진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익숙해져야 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절망이 버거워서 벗어나고 싶어지는 곳이다.

  이미 어머니는 형상만 살아 있는 사람일 뿐 “인형에 불과한 사람”이다. 창밖은 3월의 봄빛으로 충만해지고 있지만, 이 “휴식실” 안의 두 사람은 봄이 낯설기만 하다. 휠체어에 의지한 어머니나 그 휠체어를 끌고 있는 화자나 말이 없다. 형식적인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 더 이상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없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일종의 공적(公的)인 사무일 뿐이다. 더 이상 어머니에게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없는 자식은, 겉도는 관계 앞에서 “부스러기로 있는 까닭에 그걸 외로움이라고/말할 힘도 없다.” 호스피스 병동의 휴식실은 휴식이라는 수식이 무색하게 쉬는 것과는 무관한 공간이다. 플라스틱 나뭇잎으로 푸르게 장식했지만, 인위적인 푸름은 아무런 위로도 희망도 주지를 못한다. ‘마지막 잎새’가 될 수 없는 자식의 “씁쓸해져 쓸쓸해지는” 풍경이다.

  이 시는 아무런 윤기 없이 퍼석거린다. 죽음에서 건진 통찰이나 위로로 또 다른 활기를 보일 수도 있고, 미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죽음을 다르게 가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인은 지치고 피로한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 수다를 피한다. 그래서 감정의 과잉이나 상황의 과장에서 오는 호들갑이 제거된 첫 줄 “어머니는 아직 호스피스 병동 휴식실에 있다.”는 더욱더 씁쓸하고 쓸쓸하게 읽힌다.

- 「시, 그 첫 줄의 매혹」, 김남호 평론집 『불통으로 소통하기』(2014, 북인 boo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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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2009-09-08 109 (목소리)

호스피스 나뭇잎

 

 

  어머니는 아직 호스피스 병동 휴식실에 있다.

  외로움이 시나브로 내 얼굴과 목소리 색을 없앤다.

  외로움을 느끼면 어색해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돈과 삶에 여유가 생기면

  어색한 얼굴과 어색한 목소리는 다 없어진다.

  어머니는 목을 뚫어낸 관을 통해

  가래를 걸러내고 있다. 가까이에선

  진하게 보이는 어떤 사정과 말 못 하는 사람을

  휠체어에 매달고 있는 호스피스 휴식실은

  나뭇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낮 열두시,

  5분쯤 더 있다가 휠체어는 병실로 가야 한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줄어들어

  인형에 불과한 사람, 그 사람 곁에

  나는 한 사람으로 가 있어야 한다.

  3월 낮 따뜻한 햇살이 두 사람의 말 없는 장면으로만 남아버려

  씁쓸해져 쓸쓸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늘 어떤 존재들을 위한

  부스러기로 있는 까닭에

  그걸 외로움이라고 말할 힘도 없다.

  창밖 나뭇잎은 거리로 떨어져 내렸지만

  호스피스 휴식실의 나뭇잎은 탈색조차 않는다.

  그저 멍한 얼굴 하나가,

  고독으로 탈색되어 가는 제 얼굴을 보고 있다.

  나는 모른다. 누가 내 얼굴에서 탈색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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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4 ∽ 2008.09.06. (목소리에서) <원고>

 2008.09.08. 16:09.메. 박석준-08종합1-1.hwp

(목소리) <원고 교정 원작>

= 『석사학위 작품집』(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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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주기독병원 호스피스 병동거실,예배당

  광주기독병원 호스피스 병동거실,예배당

    나는 어머니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종종 이 예배당을 몇 바퀴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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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독병원4

  광주기독병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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