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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7), 사상시 (7), 상징주의 (6) 카페, 가난한 비 / 박석준

나의 신시 54 카페, 가난한 비

나의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7), 사상시 (7), 상징주의 (6)

2001-04-07

박석준 /

<원작> 등단작_(인 데/가난한 비/그러나 사람들 가난한 비/가난한 비)

카페, 가난한 비

 

 

  카페 가난한 비는 사람의 그림자를 잃어, 말의 쉴 곳을 잃어, 벽 유리엔 바깥 풍경만 어른거리고 있다.

  주인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은 아는 사람의 이야기도 이제 없다고 한다.

  주인은 자기 이야기마저 카페 창문가에 혹은 카페 문 앞에 머뭇거릴 뿐이라고 한다.

  4, 몹시 맑은 날인 데도 주인은 그저 가 오는 날이라고 한다.

  주인은 단지 그 말 한 마디에 카페는 과거로 가지 못하고 현재를 서성거린다고 한다.

  주인은 주인이었던 사람을 생각해 본다, 주인이었던 사람은 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의 이미지로만 지금은 남아 있을 뿐  이라는 해석을 하면서.

  카페 가난한 비에 비가 내리지 않는 날, 카페 가난한 비카페가 된다.

  카페 가난한 비에 비가 오면 주인이었던 사람은 가난한 비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 가난한 비를 그리워할 이유를 잃어 카페 가난한 비는 지금 가난한 비 속을 흐르고 있다, 현재가 없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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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7 2008.09.06. 10:50.. 박석준-08종합1.hwp <원작 원본>

= 문학마당2008 가을호/24(2008.09.27.) 신인상 당선작 1

=(표제: 카페. 가난한 비) 2009-03-03 오전 11:19 박석준-나의시론(논문)-1.hwp

= 석사학위 작품집(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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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2000.12.07 200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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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비극적 주체의 절망과 희망

박석준 시집 카페, 가난한 비에 대하여

 

  「가을, 도시의 밤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박석준의 모든 시가 주관적인 정서를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주체의 내면의식보다는 객체의 외면현상을 중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들 객체의 외면현상에도 그의 쓸쓸하고 우울한 심리가 깊이 침윤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어야 할 것은 그의 시에 주체의 자기 객관화가 보편적인 창작방법으로 깊이 응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객체의 시각으로 주체 자신의 현존, 곧 시인 자신의 현존을 진술하는 기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는 것이다. 풍경의 선택은 세계관의 선택이라고 하거니와,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객체의 외면은 그 자체로 주체의 멜랑콜리에 의해 깊이 포획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시 카페 가난한 비의 중심 대상은 카페 가난한 비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카페 가난한 비가 항상 중심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벽 유리에 바깥 풍경이 어른거리게 하는 주체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쓸쓸함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주체로도 존재하면서 가난한 비 속을 흐르고 있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카페 가난한 비라는 것이다.

  카페 가난한 비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시각은 독특하면서도 신선한 감각을 담아내고 있어 더욱 주목이 된다. 뿐만 아니라 더러는 과감하게 서사를 받아들여 저 스스로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는 것이 이러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그의 시이다. 침통하고 우울한 정서, 쓸쓸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기발한 서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는 얘기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위의 시는 예의 비극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주관적 화자의 상념을 고백적으로 진술하기보다는 객관적 인물의 행위를 독백적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이는 시 시간 속의 아이 테를 돌리는 아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은봉 시인, 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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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시론 ; 카페, 가난, -

  살아오는 동안 나는 말과 부딪치거나, 말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말과 관련한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적잖다. 물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없으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 정작 알게 된 것은 이 말과 부딪치는 것이 말을 하는 주체일 때가 있고, 이 말을 받는 세계(다른 사람, 사상事象, 상황 등)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말이 이루는 관계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존재라는 구역은 존재가 말 가운데서 자리잡을 때 제대로 자리를 굳히게 마련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구역이니 곧 존재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집이니까, 우리는 이 존재의 집 곁을 끊임없이 지나가면서 존재자에게 이르게 된다.”* 이로부터 존재와 말에 대해 내가 생각해낸 것은 말은 움직이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에 은 존재 사이의 모임에도 관계하게 되며, 분리(分離)에도 관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은 특히 카페. 가난한 비, 술과 밤, 흔들거리는 목소리의 슬픔등의 시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카페는 그 자체로 세계의 일종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계에 대해 사유를 하고 말을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指向지향(바람)을 갖는다. 지향의 양상에 따라 세계의 의미는 달라진다. 지향은 말에 내포되면서도 말과는 달리 외부세계를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 관념으로 자리한다. 세계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번민하던 나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어 카페. 가난한 비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만남은 일반적으로 만나러 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만나러 감만나러 감이라는 말을 바탕으로 한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세계, 즉 카페 안에서 말이 작용하는 양상은 매우 다양한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후자는 말의 부재, 말 못함, 소통 단절, 겉도는 말, 말할 수 없음 등의 양상이 내포되면서 말이 빈곤해지는 상황으로 존재할 수 있다.

  「카페, 가난한 비이 시에서는 내가 의문점으로 갖고 있는 두 요소인 카페주인을 발화의 주된 시어로 사용해 봤다. “카페 가난한 비’”, 상징화된 가난한 비라는 시어를 사용해 , 존재, 그리고 세계 사이의 관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 이 시이다.

  지속성을 품고 있는 만남은 본래 어떤 기억의 연속성과 관련되어 있다. 보통사람들은 대체로 말을 하기 위해 만남을 실현한다. 곧 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만남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말이 곧 존재의 집인 까닭이다. 하지만 처음부터든 만남의 과정에서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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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틴 하이데거, 詩人使命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詩論詩文, 조광진 역, 탐구당, 1979, 115. 이 논문은 릴케으로, 존재론에 바탕을 둔 하이데거가 사유와 시의 대화를 꾀한 미학론이다.

― 『석사학위 작품집』 「나의 시론(2009.0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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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해석(나의 삶과 관련한 해석)

  살아오는 동안 나는 말과 부딪치거나, 말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말과 관련한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꽤 많았다. 사회(조직, 모임)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사유를 하고 말을 하고 지향(바람)’을 갖는다. 그리고 지향의 양상에 따라 자신과 관련을 맺는 세계의 범주는 달라진다. 지향은 말에 내포되면서도 말과는 달리 외부세계를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 관념으로 자리한다. ‘카페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한 인간관계와 말을 실현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수정된 카페, 가난한 비(2013)가 첫 시집에 수록되었지만, 나의 <등단작=원작>카페, 가난한 비(2008)를 잘 해석하려면 먼저 카페 가난한 비’”가난한 비”, “의 의미 구분, ‘현재지금의 개념 구별, “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의 상징적 의미의 규정이 필요하다.

 

  ‘현재지금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현재(現在):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의 시간. 시간의 흐름을 어느 지점에서 끊을 때, 기준으로 삼은 그 시점. 지금 이 시점에).

  지금(只今): 말하고 있는 바로 이때()).

  내가 이 글에 사용한 현재기준으로 삼은 그 시점이다. 내가 말을 잃어서 기준 시점이 없기(기준 시점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가 없기 때문에 지금과거로 갈 수가 없다.

 

“  카페 가난한 비’”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소통하거나 말을 실현하는 세계(만남, 모임)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엔 가난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고, 카페는 의사소통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떨어지거나 내려가는 것’, ‘비정상적인 것’, ‘슬픔[비애(悲哀)]’, ‘씻어내는 것[우수(雨水)]’ 등 복합적 의미와 이미지를 지닌 말이다. 그 중 가난한 비는 가난함에서 오는 비정상적인 것, 슬픔의 의미를 지닌다.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한 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45살 때의 삶(의 양상이나 색깔)20살 때의 삶(의 양상이나 색깔)과 같아지는 날또는 ‘(지적이면서도) 정확한 날을 의미하는 개인적 상징어이다.

 

  나는 전교조 건설 운동을 하다가 1989814일에 목포의 먼 곳에서 해직되었다. 19943월에 완도의 소안중학교로 복직한 후엔, 19973월엔 해남의 송지종고로 전근하고, 199991일엔 목포의 목포상고로 전근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복직 조합원들이 나를 꺼리고 배제한 까닭에 나는 전교조 운동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빠져서 번민했다. 그리하여 20009월 초에 인터넷 카페 <가난한 비>를 만들었다. 나의 말을 실현할 수 있고 보다 풍부한 인간관계를 맺는 장을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카페 <가난한 비>에 사람이 별로 찾아오지 않음을 2001226일에 44살인 내가 깨닫게 되어 위기의식을 느꼈고 글 <내가 발길을 흘리다가 그 카페 앞에 왔을 때 1>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47(토요일) 오전엔 내가 지식정보, 인간관계, 경제 형편, 신체의 측면에서 매우 가난한 사람임을 의식하고, 괴로워하다가 2시간 동안 글 카페 가난한 비(등단작 카페, 가난한 비의 원고)를 써버렸다. (시를 쓰려고 쓴 글이 아니지만 인터넷 카페 <가난한 비>에 게시하고 싶어서) 글에 나의 처지를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어서, 상징어도 사용하면서 시적 형식으로 써버렸다. (이 글을 2001.07.13.일에 카페 <가난한 비>에 게시했다.)

  나의 존재가 나의 말을 건넬 사람들 속에 있지를 못하고, 나의 실존이 실현되지 않아서, 나는 나 자신이 가난한 비가 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식·정보, 경제적 형편, 신체, 인간관계면에서 가난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청년 시절이 20살에 시작하여 39살까지 진행된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 중 20살은 섬약하면서 생동적이고 투명하고 intelligence(지능, 총명함, 지성, 정보, 지성적·이성적 존재)가 발현되기 시작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카페 가난한 비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이라는 표현(개인적 상징어)을 낳게 했다. 그런데 사오-이십‘45=20’을 대신한 표현이다.

  구구단에서 20을 언급하는 경우는 오사-이십도 있는데 구태여 사오-이십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까닭은 카페 가난한 비를 쓰는 나는 매우 가난한 상태에 놓여 있고 나이가 44살이기 때문이다. 44살 시절에 실현하지 못했으나 1년 후인 45살 시절엔 실존을 실현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립되이 아니라 사오-이십이 성립되 이라고 표현되었다. ‘성립되던이미 있었던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이미 있었던 사오-이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확함이다.

  내가 사용한 사오‘45, 45살 시절, 45살 시절의 삶을 암시하는 말이며 이십‘20, 20살 시절, 20살 시절의 삶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이란 ‘45살 시절의 삶(의 양상이나 색깔)20살 시절의 삶(의 양상이나 색깔)과 같아지는 날을 의미하는 표현이 된다. 즉 글에 사용된 사오-이십‘4×5=20’이라는 정확함정확하게 살아감‘45살 시절의 삶을 20살 청년 시절 삶처럼 정확하게 살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오-이십이 성립되 이라고 표현은 이 글 카페. 가난한 비아방가르드 경향을 낳는 요소가 된다. 이 글은 인간의 실존문제를 상징주의 기법으로 형상화한 나의 사상시이다. “카페 가난한 비에 비가 내리지 않는 날, 카페 가난한 비는 카페가 된다./카페 가난한 비에 비가 오면 주인이었던 사람은 가난한 비가 된다.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나의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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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작)_시집_(인데/가난한 비/ 사람들 가난한 비/가난한 비)

카페, 가난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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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가난한 비는 사람의 그림자를 잃어, 말의 쉴 곳을 잃어, 벽 유리에 바깥 풍경만 어른거린다.

  주인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은 아는 사람의 이야기도 이제 없다고 한다.

  주인은 자기 이야기마저 카페 창문가에 혹은 카페 문 앞에 머뭇거릴 뿐이라고 한다.

  4, 몹시 맑은 날인데도 주인은 그저 가 오는 날이라고 한다.

  주인은 단지 그 말 한마디에 카페는 과거로 가지 못하고 현재를 서성거린다고 한다.

  주인은 주인이었던 사람을 생각한다, 주인이었던 사람은 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의 이미지로만 지금은 남아 있을 뿐이라는 해석을 하면서.

  카페 가난한 비에 비가 내리지 않는 날, 카페 가난한 비카페가 된다.

  카페 가난한 비에 비가 오면 주인이었던 사람은 가난한 비가 된다.

  사람들이 가난한 비를 그리워할 이유를 잃어 카페 가난한 비는 지금 가난한 비 속을 흐르고 있다, 현재가 없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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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7 오전 1:34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21025.hwp <출판사 교정(사람들이/‘가난한 비’)>

=2013-01-06 오전 6:01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315-2(내가 모퉁이로 사라졌다가).<출판사 재교정(가난한 비)>

= 시집_카페, 가난한 비(2013.02.12.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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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2001-04-07

카페 가난한 비

 

 

  카페 가난한 비는

  사람의 그림자를 잃어,

  말의 쉴 곳을 잃어

  그 벽 유리엔 바깥 풍경만 어른거리고 있.

 

  주인은 주인이 아니.

  주인은 아는 사람의 이야기도 이제 없다고 했었.

  주인은 자기 이야기마저 카페 창문 가에

  혹은 카페 문 앞에

  머뭇거릴 뿐이라고 .

  4월 몹시 맑은 날이었어

  주인은 그저 비가 오는 날이라고 .

  주인은 단지 그 말 한 마디에

  카페는 과거로 가지 못하고

  현재를 서성거린다고 .

 

  주인은 주인이었던 사람을 생각해 본다고 했다.

  주인이었던 사람은

  사오-이십이 성립되던 날의 이미지로만

  지금은 남아 있을 뿐이라는

  해석을 하면서.

 

  카페 난한

  비가 내리지 않는 날

  카페 난한

  카페가 된다.

 

  카페 난한 에 비가 오면

  주인이었던 사람은

  가난한

  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난한 비를 그리워할 이유를 잃어

  카페 난한

  가난한 비 속

  지금 흐르고 있다.

  현재가 없는 지금.

            -------------- 2001.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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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7 (원고)

= 2001.07.13. 21:55. 카페 가난한 비_카페 가난한 비 (원고 원본)

https://cafe.daum.net/poorrain/F1vW/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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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문학마당 24호 (2008년 가을)

  문학마당 24(2008년 가을)

    내가 문학마당 신인상 으로 등단잔 잡지

    이 잡지 신인상에 나의 시 6(카페. 가난한 비, 술과 밤, 흔들거리는 목소리의 슬픔, 별이 빛나는 밤, 내가 모퉁이로 사라지고 탁자 앞에 나타났을 때, 산책길에 때로 둘러본 인생)이 당선되어 내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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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rain 2-99.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 가는 길

  poorrain 2-99.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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