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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26), 의식의 흐름 (2)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 / 박석준

나의 신시 23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26), 의식의 흐름 (2)

1985-10_초순

박석준 /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내게 비지는 반복,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애틋해지지만

  그래서 진실 여겨진다.

  반복됨이야말로 간단한 형식이고

  그 속에 사정事情이 내게 닿아,

  내가 도망치듯 을 잃어

  배반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도 집을 나서고 집에 돌아와 선 것이

  시계처럼 나는 똑같았지만

  그렇다고 허름한 모습의 동생 둘,

  이웃집에서 차비 빌려 목포까지 일하러 가 있던 나

  다만 맥없이 지친 모습은 아니어야 했는데.

 

  끄응 끙, 으음 음

  없어서 신음 소리가 이렇게 약할까.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내게 비지는 반복,

  그걸 알 때마다

  나 분리되고 싶어

  배반인지 알 수가 없다.

  살아야 한다는 의식만이 뚜렷이

  도망치듯 을 잃은

  뒤를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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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0_초순 2014-02-20 01:45 (진실스럽) <원작 원고>

(오인한 오타 정정: 진실) 시집_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2016.12.02. 문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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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5-10_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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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쇼윈도 거리를 걷는 현대의 햄릿 -

 

  문제는 박석준의 거짓 시처럼 진실의 진실을 말하는 시 역시 역설의 순환에 놓인다는 점이다. 마치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꾸만 우울해진다. 이것은 거의 형벌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는다. ‘반복은 그에게 진실을 지킬 유일한 길이다.

 

    내게 비지는 반복,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애틋해지지만

    그래서 진실게 여겨진다.

    반복됨이야말로 간단한 형식이고

    그 속에 사정事情이 내게 닿아,

    내가 도망치듯 말을 잃어도

    배반인지 알 수가 없다.

―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부분

 

  이러한 상황은 세상이 쇼윈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구조 상 공통점 때문이다. ‘쇼윈도는 소통 불가뿐만 아니라 현혹의 이미지 또한 담고 있다. 그 이중성이 문제다. “퇴근을 하고 열어보는 여러 얼굴들/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날/아름다운 사람이 스쳐 간다. 그때/안다고 누군가 인사하는/몸짓이 재생된다, 유리창 밖 세상처럼”(마흔다섯 넘어)에서 세상이라는 시어를 사용하는 것, 박석준 시의 화자는 이미 도시인이다. 같은 시에서 “SALE!”살래?”로 읽는 장면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그러한 자본주의적 논리를 음험한 것으로 보지만 그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애매한 모습의 자신을 명쾌하게 형상화해 낸다. 이나 가난함에서 보이는 말의 흐름또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돈으로 돌고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 으로 상” “그 사람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데 기표의 흐름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도시가 가진 이중성 때문이다.

  이 이중성을 넘어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처절한 , 음울하지만 찬란하다. 그것은 필시 그가 투명하고 민감한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될 것이므로, 세상과 관계 맺기가 내면으로의 침잠과 우울로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그가 세상과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김청우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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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시집들과 관련된 해석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198510월 초순의 날들에 나(박석준)와 관련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 일로 인해 내게서 일어난 생각을 시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신음 소리를내는 곳은 내가 사는 은성여관이다.

이 글은 1연에서 반복이라는 추상어를 객체로 사용하고 있다.(‘반복이라고만 되어 있어 무엇의 반복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진실게 여겨진다.”의 주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반복) 속에 사정事情이 내게 닿아에서는 어떤 사정事情인지 알 수 없다.(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무엇의 반복에 들어 있는 무슨사정 때문에 내가 도망치듯 을 잃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박석준)말은 요구와 충당으로 그 형태가 드러난다.’(인의 말_(카페, 가난한 비))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가난한 집에 돌아오면 돈이 없어서 말을 못 한 채, “말을 요구와 충당으로 살리지 못한 채”(11)로 있는 것이다. 라고 추측하게 할 뿐이다.

  한데 3연에서 끄응 끙, 으음 음이라는 소리가 나타나고 다시 내게 비지는 반복”, “배반인지 알 수가 없다.가 언급된다. 반복끄응 끙, 으음 음”(이라는 소리 = 어머니의 신음 소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돈 없어서 신음 소리가 이렇게 약할까라는 말로 인해 사정事情의 막연한 형태가 돈 없는( 데서 생기는) 사정事情으로 명료해진다. 이 글은 내게 비지는 반복배반인지 알 수가 없다.”1, 3연에 확대 배치함으로써 반복사정의미를 명료화하고 의 의식 내용을 알게 하는 흐름(구성)을 취하고 있다. “의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한다는 의식”(실존주의 의식)이다.

  이 글의 반복이란 돈 없는 사정으로 인해 나타난, 어머니의 신음 소리이다. 이것은 돈 없는 가난한 삶이 어머니에게 가져다준 고통이라고 볼 수 있다. “는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알 때마다그런 고통스러운 삶에서 분리되고 싶고, “분리되고 싶어서 말없이 도망치고 싶고, ‘신음 소리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의식’(욕망)이 강해진다. 실존하고 싶은 욕망이 강해진다. 그래서 허름한 모습의 동생 둘, 차비 빌려 목포까지 일하러 가 있던 나, 다만 맥없이 지친 모습은 아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는 말을 잃는다.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가난함에서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려는 실존하려는 의식(또는 의지, 욕망)’을 표현한 실존주의 모더니즘을 반영한 글이다.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한 글이다.

  “오늘도 집을 나서고 집에 돌아와 선 것이/ 시계처럼 나는 똑같았지만은 현대의 기계문명과 조직 속에서 도시 소시민의 기계처럼 반복되는 삶과 일상이며, “허름한값이 싼 듯한, 가난한이라는 의미와 낡고 헌 듯한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띤 말이다.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쇼윈도 세상)에서 이 사람의 삶의 질을 바꾼다는 현실 비판 의식 없어서 신음 소리가 이렇게 약할까.에 깔고 있다.(앙가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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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實存主義)

  실존주의는 개인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문예사조(사상)이다. 근대의 기계문명과 메카니즘적 조직 속에서 인간이 개성을 잃고 평균화·기계화·집단화되는 소외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기치를 내걸고 등장했다.

  신이나 본질이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본래적 자기를 자기 스스로 계속 만들어 갈 수밖에 없음이 실존주의의 제1원리다. , 허무와 자유 속에서의 자기 부정과 자기 초월의 반복을 통해서 자각적인 주체성이 창조된다. 주체적 결단에 의한 새로운 자기 존재의 선택과 비약은 자유를 근거로 한 자기 기투(企投). 여기서 실존은 역사적 · 사회적 조건에 규제되는 세계--존재”(In-der-Welt-sein)이며, 고뇌·죄책(罪責죽음 등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직면한다. 실존주의는 실존을 현존재로써 그 주체성·자유·초월·결단·상황·성실 등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려고 한다.

  전후의 실존주의 문학은 리얼리즘·모더니즘·휴머니즘 등과 얽혀 복잡성을 띠고 있다. 첫째, 실존주의의 인간관계 단위는 개체(개인)인 단독자이며, 리얼리즘의 그것은 개체를 초월하는 어떤 객관적인 법칙의 힘이나, 전후의 실존주의는 객관적 묘사(현실과 존재 사이의 억압 양상)와 현실참여로 리얼리즘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둘째, 실존주의의 허무주의와 모더니즘의 회의주의, 실존주의의 출발점인 실존과 모더니즘의 자아, 그리고 저항과 부정 등에서 전후의 실존주의는 모더니즘과도 밀착되어 있다(특히 시에서). 셋째, 전후의 실존주의는 사르트르의 휴머니즘을 수용하면서 전쟁 및 허무의 체험과 극복을 위한 휴머니즘과 앙가주망(engagement)의 방향을 취한다. 현실참여론은 역사의식, 비판과 고발, 민중의식 등과 어울려 1960년대의 리얼리즘론으로 발전한다.

  실존주의 철학사상은 동시에 문학사상으로도 발전한 바, 사르트르를 비롯하여 앙드레 말로(Malraux, A.), 메를로-퐁티(Merleau-Ponty, M.), 카뮈(Camus, A.), 생텍쥐페리(Saint-Exupery, A.) 등을 대표적 작가로 볼 수 있고, 소급해서 체코의 카프카(Kafka, F.)를 추가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682

https://namu.wiki/w/%EB%AA%A8%EB%8D%94%EB%8B%88%EC%A6%9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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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사용한 심리학의 개념이다. 그의 이 개념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문학과 예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의식은 정적인 부분의 배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이미지와 관념이 흘러 늘어선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앙리 베르그송도 시간과 의식에 대한 고찰에서 제임스와 같은 시기에 유사한 착상을 하였고 "고수"라는 개념을 주창하고 있다. 베르그송과 제임스는 서로 교류를 하였지만 영감은 서로 독자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표현법으로, 자동기술법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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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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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 S. 엘리엇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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