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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창작년도)

나의 무비즘 (16), 실존주의 앙가주망 (13) 아버지 ― 무너진 집 / 박석준

나의 신시 18 아버지 무너진 집

나의 무비즘 (16), 실존주의 앙가주망 (13)

1984 / 1985-02

박석준 /

아버지 무너진 집

 

  우리 식구들은 계림동 우리집을 잃고, 털고 남은 돈으로 19821월에 중흥동 장원여관을 빌렸다. 수감된 자식들에게 넣을 영치금이라도 벌고 싶은 61살 아버지는 광주항쟁이 끝난 후에 62살에 송정리의 달방에서 살면서 수레를 끌고 고물을 주워 팔았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지.”(→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라고 중1 나에게 새겨주었는데,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19832월에 장원여관으로 돌아왔다. 나는 몸이 몹시 허약하고 아프지만 우리 식구들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어서 직장을 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나의 누나가 간첩의 집안이라고 몇 년 전에 시댁에서 쫓겨나 두 애를 데리고 여관 근처 작은 술집에서 일했고, 국민학교만 졸업한 수와 중학교를 졸업한 헌, 두 동생도 남의집살이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먼 곳에 직장을 구했으나 집에 돈이 없어서 목포에 방을 얻지 못하고 광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그날그날 출근하는 길을 택했다. ‘먼 곳까지는 1시간 20분쯤 걸리는 까닭에 어머니가 새벽 530분에 나를 깨우고 장원여관을 나서 표를 끊고 줄을 서려고 터미널로 갔다. 한데 1980년에 폐지한 연좌제를 나에게 형들의 일(남민전 사건)로 시도한 안기부에게 각서를 쓴 후에야 정식 채용된 처지여서, 눈이 아파도 조퇴를 할 수 없었고 통증이 와도 안대로 가릴 수도 결근을 할 수도 없었다.(→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 나는 19833월 초부터 먼 곳에 일하러 갔지만 420일에야 정식 교사로 채용되었다. 감시와 통증 속에서 1년을 흘러가 1984419일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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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무너진 집

 

 

  844월 토요일,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 장원여관

  출입문을 들어섰을 때, 누나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제야. 아버지가 이상해야. 니가 막 집에서 나간 뒤인께

  아직 새벽인디, 나보고 힘이 없어 옷을 못 입겠다면서,

  사 오라고 하더라. 언제 아버지가 빵 드시디? 하도

  이상해서 문 밖에서 보고 있는디, 빵이 목에 걸렸는가

  발이 휘청거리면서 쓰러져버렸어야. 하도 놀라서 오매,

  아버지! 정신차리시오.’ 했는디 뭔 말을 못 하신다.”

  나는 입에서 , ,” 소리를 내느라고 움푹 팬 볼만

  움직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옮겼을 때 , ,” 소리를 내느라고 힘이

  들어 그런지 이불이 불렀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았다.

  밤 아홉 시쯤에 헌과 함께 온 의사는, , ,’ 소리를

  내는데도, 뇌진탕으로 쓰러진 직후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누나가 자기 탓이라며 울었다.

 

  월요일 1교시를 끝내고, 교감의 말에 처음으로 조퇴를

  하고 버스를 타고 내가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숨을 쉬지

  않았다. 돈 구하겠다고 헌이 아침에 나갔다는데.

  헌이 가져온 30만 원으로 망월동에 묘지

  계약하고, 나는 묘비에 새겨질 글씨를 썼다.

  수요일. 망월동엔 비가 아주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수가 영정을 가슴에 안고 학영 형과 인학이 관을 맸다.

  장례를 치른 뒤 방안은 어두운 길로 젖어들 것만 같았다.

  작은형이 회의를 하자고 하여, 결국

  “말하지 말아라. 돌아가신 걸 알면 둘 다 괴로워서 병 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식구대로 고생한 보람도 없이.”

  라고 한 어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9월 말 일요일, 우리는 여관에서 떠나야 했다,

  집세를 밀릴 정도로 2월부터 적자가 심해서.

  그 일요일, 장판을 끄집어내려다가 우리는 그 밑에 있는

  습기 젖은 20만 원과 청자 두 갑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 쓰시라고 처음으로 드린 3월 월급 20만 원이

  고스란히 있어서, “고생하는 니 엄마나 주지.”라고

  말하면서도 그냥 받아두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계림동 집을 떠날 무렵 대학교 3학년인 나에게

  “니 큰형은 크리스마스 날 석방될 것이다.

  대학에 다닐 사람은 니가 아니고 니 큰형이.

  “너는 아무리 공부를 해봐야

  니 큰형 손톱만큼도 못 따라간다.하셨는데.

  홀로 송정리에 달방을 얻어 수레를 끌고 고물을 줍는

  아버지를 이사 후 모셔왔는데.

 

  그러나 852월의 면회에서 큰형이

  “아버지한테 뭔 일 생겼지? 솔직히 말해라. 돌아가신 것

  아니냐? 내가 아무리 갈 수 없는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알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계속 아버지에 관한

  말만 재촉하는 것을 안쓰러웠던지 헌이 실토했다.

 

 

  * 이학영 :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 남민전 사건의 관련자. 시인.

  * 인학 : 1980에도 나오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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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2020-04-13 11:58 (.”, ) <원작 원본>

(. ) 시집_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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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

    1984-04-19()1984-04-25(). 중흥동 장원여관

    1984-09-말경. 중흥동 장원여관

    1985-02. 광주교도소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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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과 관련한 해석

  자서전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에 수록된 아버지 무너진 집은 한 교사의 가족과 관련하여 4가지 시공간에 벌어진 상황을 4개 연으로 구성하여 단편서사시 형식으로 쓴 글이다. 글에서 현재 시점은 1984(13), 1985(4)이다. 형제가 (이 글에는 지금까지로만 표현되었으나, 197911월부터) 남민전 사건으로 집에 갈 수 없는 곳에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시공간이 이동하여 펼쳐낸 상황과 사정을 표현하는 무비즘 기법이 사용되었다.

  이 글에는 세 사람의 마음(갈망)이 흘러간다. “아버지의 의식 없는 상태를 , ,” 소리를 내느라고 움푹 팬 볼만 움직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 ,” 소리를 내느라고 힘이 들어 그런지 이불이 불렀다 꺼졌다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버지가 죽지 않기를 갈망했다. (의사는 , ,’ 소리를 내는데도, 뇌진탕으로 쓰러진 직후 사망했다고 추정했지만)

  “아버지에게 니 큰형은 크리스마스 날 석방될 것이다. 너는 아무리 공부를 해봐야 니 큰형 손톱만큼도 못 따라간다.” 하셨지만, “가 처음으로 드린 돈을 그냥 받아두고는 쓰지 않았다.

 

    먹고 싶으니 사 오라 한

    목에 걸려 여관에서 아버지가 죽어버리고

    가만가만 봄비가 내리던 84

    묻고 떠나는 묘지에서 알았지.

    자유와 정의를 지향한 두 아들*

    남민전 사건으로 갇힘과, 가난이

    아버지에게 슬픔을 일으켰다는 걸.

박석준, 축제 대인예술야시장에서부분

 

  “가난(이 일으키는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표상이라고 판단된다. “은 글의 흐름을 만들어낸 소재이며,   글에 표현되지 않았으나 남민전 사건과 관련된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아버지의 죽음을 말하지 말아라. 돌아가신 걸 알면 둘 다 괴로워서 병 날/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사정에 주목하여 이 글이 작가의 우울이라든가 멜랑콜리의 투영이라고 보는 것은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 무너진 집무너진 집이라는 상징어로 표현한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어야만 하는 슬픔, 한국 현대사에서 정권(국가 폭력)이 한 가족을 해체시켜버린 아픈 역사가 형상화되었다. 이 글에서 시인은 부정적인 정치 사회현실에서 자기구속(앙가주망)과 비판적 인식의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실존주의)를 생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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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민전사건 시화 아픈 삶의 고해

  그의 시에는 아픔이 서려있다. 그의 작품에는 정제되지 않은 채 투박한 삶의 테두리 안으로 국가 폭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개입하는가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민주화운동 선봉에 섰던 큰형 박석률과 셋째형 석삼은 유신체제 말기에 날조된 공안사건으로 꼽히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의 주역이다.

  그 이전 큰형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앞서 언급한 남민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큰형은 민청학련 10개월, 남민전 91개월, 범민련 10개월 등 총 107개월 투옥됐으며, 남민전으로 인해 사형 구형 후 무기를 선고받았다. 셋째형은 남민전에 연루돼 무기 구형 후 15년 징역형에 처해진 뒤 91개월 투옥됐다.

  온 시대를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던 셈이다. 그의 시에는 이같은 굴곡진 삶이 그대로 노정된다. 일상이 초토화되는 상황을 목도했다. 전 생애에 걸쳐 드리운 그늘이었다. 남민전 사건은 당사자들의 가족을 해체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시켰다. 이같은 남민전 사건을 고스란히 담아낸 시집이 나왔다.

  특히 이 시집에는 힘들고 불안했지만 정의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엄숙하고 순수한 정신이 투영돼 있다. 큰형의 수감으로 인해 가족들의 가난과 불행 및 불안이 시작됐지만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그의 삶을 기꺼이 다독인다. 큰형을 한 개인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역사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시 속에는 가감 없이 이런 사실들이 노정된다. 이 사실들의 기술은 굿이나 무술 같은 행위 절차 없이 해원에 가닿는 방법으로 읽혔다.

광남일보, 고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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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망월동엔 비가 아주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는 후일(2001년에) 카페, 가난한 비(박석준의 등단 시)를 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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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버지-어머니 [회전]20200724_120009

  아버지-어머니 [회전]20200724_12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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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작은형-누나. 광주고속 옆 서울다방. 1985-05. img426

  큰형-작은형-누나. 광주고속 옆 서울다방. 1985-05. img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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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뒤)-수-큰형-김세원. 광주고속   뒤.  1985-05. img431

  학()--큰형-김세원 선생. 광주고속  뒤. 1985-05. img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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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먼 곳 선생들. img378

  나-먼 곳 선생들. img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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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학-나. 1982년 5월. img313

  인학-. 19825. img313

      인학(앞줄 빨간색 잠바), (25, 맨 앞 고동색 잠바)

      대학 시절에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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