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비즘 (4)
1971 / 2011-12-06
박석준 /
한 소년
내비게이션에 찍힌 수만리, 중학교 졸업 후
36년 만에 만나게 된 친구가, 우연히
TV에서 알게 된 서로의 옛 친구가 산다는 곳
찾아가자고 오늘 낮 서둘렀지. 친구 차로 출발했어.
세 시 반 산속 마을의 길 위로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나타나더군. 구레나룻의 얼굴은
내 기억이 담고 있는 얼굴이었어. 이 민박집 주인은
나를 보며 ‘입술이 파랬던 아이’를 말했지.
그 집에선 개가 짖었고, 닭들이 사람을 피해
구구구 하며 움직였지. 사가지고 간 닭튀김과
민박집 주인이 담가둔 동동주가 너무 잘 어울렸지.
자넨 그림에다가 보라색을 먼저 칠했지. 나는
녹색 잉크만 썼고. 집에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40년이나 멈춰진 소년시절을 셋은 그림처럼 그렸지.
만나면 뭘 말을 할까,
간밤 생각했는데. 나는 화가가 못 되고
친구는 지금 선생이다. 곡절이 많거나 적거나
가장이 된 두 사람, 일을 해야 한다, 하다가
한 소년의 모습이 덮고 지나가더군.
.
2012-08-16 ⁓ 2013-01-06 오전 6:01 (완)
―시집_『카페, 가난한 비』(2013년)
.
.
1. 내용: 뜻밖의 만남들
「한 소년」엔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는 장면’이 펼쳐진다.
“세 시 반 산속 마을의 길 위”에서, 화자인 “나”는 “어디서 본 듯한” “구레나룻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내 기억이 담고 있는 얼굴”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얼굴은 “나를 보며” 곧바로 “입술이 파랬던 아이”라고 “40년이나 멈춰진 소년”을 떠올려낸다.(“36년 만에 만나게 된” 친구가 누구하고 함께 간다고 이미 이름을 알려줬다고 해도 “입술이 파랬던 아이”를 떠올려낸다는 건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글엔 함께 찾아간 친구를 ‘36년 만에 만난’이 아닌 “36년 만에 만나게 된”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뜻밖의 만남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2. 색깔로 남은 ‘옛 친구의 소년시절’ ― 이미지즘/상징주의
「한 소년」에는 색깔로 남은 ‘옛 친구의 소년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징주의 및 이미지즘 수법이 사용되었다. “옛 친구”의 기억에 남은 세 가지 색깔은 어떤 사람의 사정을 암시한다.
옛 친구가 “나”를 보며 곧 “입술이 파랬던 아이”라고 ‘파란색’을 떠올려낸다. “입술이 파랬던”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40년 전에 남긴 흔적인데 무엇 때문에 친구에게 기억으로 자리잡았을까?
‘입술이 파랬던 아이’란 이상(李箱, 1910 ~ 1937)의 시 「오감도(烏瞰圖)」에 나오는 ‘十三人의兒孩(13인의 아해)’처럼 난해한 아이이다.
― 그의 시는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어야 이해하기가 쉽다.
라고, 이 글이 실린 시집 『카페, 가난한 비』를 본 김백겸 시인은 평했다.
“자넨 그림에다가 보라색을 먼저 칠했지. 나는
녹색 잉크만 썼고. 집에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⓵ 녹색 잉크만 썼고
상점에서 다른 색 잉크을 사서 쓰면 될 텐데 왜?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집에 그것밖에 없었으니까.’라고 옛 친구는 덧붙이고 있다. 즉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집이 가난했으니까’이다. “녹색”은 ‘가난함’을 상징한다.
“잉크”는 중학교 때부터 쓰는 필기도구이다. 이 시어는 “중학교 졸업 후”와 연결되면서 “40년이나 멈춰진 소년시절”이 ‘중학교 시절’임을 짐작게 한다.
⓶ 그림에다가 보라색을 먼저 칠했지
그런데 글 속 인물들끼리만 아는 “보라색을 먼저 칠했지.”와 “입술이 파랬던(파란)”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뭔가 암시하는 것 같다. “보라색을 먼저”, “입술이 파랬던”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림에다가 보라색을 먼저 칠했지”는 “나는 화가가 못 되고”와 연결되면서 “나”의 꿈이 화가였음을 또는 “나”가 화가가 되기를 “옛 친구”가 소망했음을 생각게 한다.
빨간색과 파란색의 중간에 위치한 보라색은 세 가지의 상징으로 분류된다.
긍정적 상징: 고귀함, 고고함. 세련됨, 화려함, 권력, 강력함, 희망, 예술,
중립적 상징: 신비스러움, 몽환, 초자아, 고독, 애증,
부정적 상징: 악, 우울, 불안, 상처, 갈등, 슬픔, 이질적, 병약함, 죽음, 혼돈, 폭력, 어둠, (나무위키, ‘보라색’)
한편으로 색채 심리학에 따르면 보라색은 몸과 마음의 조화를 원할 때 끌리게 되는 색으로 알려져 있다. 심신이 피로할 때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색이며, 숭고하고 신비로운 색으로 보았다. 실제로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픈 시기에는 유난히 보라색을 선호하게 된다든지, 몸이 허약하거나 병약한 사람들도 보라색에 끌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미 신안군 예술감독, 보라색 다리 건너 ‘퍼플섬’, 2020.03.05.)
이러한 일반적인 상징 의미를 적용하여, “보라색”은 ‘화자가 이루고 싶었던 꿈(화가, 예술)’을 또는 ‘화자가 어떤 것(병, 가난 등)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을 암시하는 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라색”은 “입술이 파랬던”을 해석해야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⓷ 입술이 파랬던 아이
입술은 빨갛다는 게 정상 상태이다. 파란 입술은 비정상 상태를 의미하며 “입술이 파랬던”은 ‘병든’ 내지는 ‘죽음을 앞둔’, ‘치유가 필요한’이라는 뜻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글에는 작가의 삶이 반영되기도 한다. 「한 소년」은 2013년에 출판된 시집 『카페, 가난한 비』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7년 후인 2020년에 나온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에는 ‘팔로4징후’(「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TOF’(「생의 프리즈 ― 절규」)란 말이 있다. ‘TOF’는 선천성 희귀 심장병이며 그 한 증상으로 ‘청색증’이 나타나는데 ‘청색증’이란 혈액 속의 산소가 줄고 이산화 탄소가 증가해 피부, 입술, 손톱이나 점막이 파랗게 보이고 호흡이 곤란한 증상’이다.
이런 사항을 감안한다면 “입술이 파랬던 아이”는 ‘TOF라는 희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된다. ‘파란색’은 ‘병(든)’을 상징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어른인 현재의) “나”에겐 입술에 파란색이 없다. ‘녹색’만을 쓰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불안한 마음이 ‘파란색’만을 보이고 있는 친구의 처지가 안타깝거나 불안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그 처지의 유사함 때문에 “옛 친구”에게 ‘파란색’이 자리잡았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파란색’은 “옛 친구”의 기억에 자리잡아 “40년이나 멈춰진 소년시절”(시간)을 “오늘”(어른 시절)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 색깔이다. 또한 “나”와 옛 친구가 예전에 절친한 관계였음을 알게 해주는 색깔이다.
3. 현재가 없는 존재 ― 실존주의 철학
⓸ 소리
이 글에서 흘러간 소리는 “서로의 옛 친구가 산다는 곳/ 찾아가자”, “입술이 파랬던 아이” 등 두 친구의 말소리, 개와 닭의 소리까지 4가지뿐이다. “나”는 간밤에 “만나면 뭘 말을 할까” 생각했지만, 만난 후에 무슨 말을 했는지, 혹시 하고 싶은 말도 안 하고 나왔는지, 이 글에선 알 수가 없다. “나”의 말소리는 없다.
한편 “나”의 친구들은 가장이며 직업이 있고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현재는, 가장인 건지 직업이 있는 건지(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는 연금수혜자나 부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나”의 현재 상황(사는 형편)을 알 수 없이, “한 소년의 모습이 덮고 지나가더군.”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은 끝나고 만다.
이것은 “나”는 오늘 친구들과 함께 있지만, 두 친구들에겐 과거의 소년으로만 존재할 뿐, 현재(의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실존주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전하고 싶은 말, ‘사람은 말을 하고 일을 해야 하고 소외되지 않으면서 살아가야 하고, 동물은 자기 소리를 내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꿈은 의미 없는 현재(실존하지 못하는 지금)를 낳을 뿐이다.’라는 말이 남아 흐르고 있다.
4. 몽환적이다. 영화 ― 무비즘
그런데 “한 소년”은 누구일까? “입술이 파랬던 아이(나=화자)”일까? 특히 이 글의 제목과 같다는 점에서 “한 소년”의 정확한 의미를 해석해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소년」은 ‘입술이 파란’. ‘보라색을 먼저 칠한’, ‘녹색 잉크’로 색깔 이미지를 결합한 암시와 상징의 수법을 사용했다. “36년 만에 만나게 된 친구”와 “나”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다. 낮에 들어간 상점 안, ‘차 안’에 있는 장면을 떠오르게 하고 “산속 마을의 길 위”가 나타난다. 민박집에선 개가 짖었고, 닭들이 사람을 피해 구구구 하며 움직인다.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 수 없으나 ‘술(동동주)’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한 소년의 모습이 덮고 지나가더군.” 하면서 끝나고 만다.
이런 점에서 「한소년」은 몽환적이다.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 글은 나의 무비즘을 반영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는 장면’이 펼쳐진다.
‘시간’과 ‘색깔’과 ‘말소리’와 ‘형상’, ‘공간이 바뀜’에 따른 언어의 변주, 이것이 「한소년」에서 표현된 무비즘(movieism)이다.
글에는 작가의 체험(삶)이 반영되기도 한다. 이 글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글쓴이나 글쓴이와 “나”의 관련성 등에 대한 정보들이 필요하다.
.
.
「한 소년」의 실제상황
1971 (중2 때) 회상
2011-12-06 (현재 시점)
.
.
사진
목포제일여고 근무시절. 2010-10-06 오후 2:57. IMG_7894
.
경옥, 나, 주섭. 2020-0612박석준시집출간기념회 (106)
시집-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 출판기념회. 광주 황대포빈대떡. 경옥, 나, 주섭. 2020-0612박석준시집출간기념회 (106)
.
진태, 경옥, 나, 경주. 2020-0612박석준시집출간기념회 (130)
시집-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 출판기념회. 광주 황대포빈대떡. 진태, 경옥, 나, 경주. 2020-0612박석준시집출간기념회 (130)
.
'문학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28), 나의 무비즘 (115) 불안_(시집본) / 박석준 (0) | 2024.02.28 |
---|---|
나의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27), 나의 무비즘 (114) 불안_(문학마당본) / 박석준 (0) | 2024.02.28 |
나의 실존주의 앙가주망 (59), 아방가르드 (25), 의식의 흐름(17), 나의 무비즘 (112) 세련되지 못한 가을비 / 박석준 (1) | 2024.02.28 |
나의 초현실주의 (5), 나의 무비즘 (87) 난 널 어떻게 만났지? / 박석준 (0) | 2024.02.28 |
나의 실존주의 아방가르드 (24), 의식의 흐름 (16) 비 한난가, 페카 ― 차갑고도 뜨거운 집 / 박석준 (0) | 2024.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