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시 80 수선화
나의 무비즘 (70), 실존주의 의식의 흐름 (13), 상징주의 (11)
2005-08-02
박석준 /
수선화
내 방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머릿속엔 수선화들이 흔들거린다.
인터넷으로 ‘집 벽에 금이’로 검색하고
눈이 피로해지도록 보았다. 세잔의 ‘벽에 금이 간 집’을,
블로그의, 카페의, 웹문서의 글 따위를.
역에까지 갔다가 사람 구경만 하고 택시를
탔어요, 라고 했지만 선배 오빠 두 사람을
만났어요, 라고 했지만 역에서 나왔을 땐
사이렌이 울렸어요, 라는 말은 안 했다. 역에선
각각 사람 머리 위로 날아가는 세월을
보고요, 라는 말도 안 했다, 그가 딴말을 해서.
문자메시지는 안 보내는 게 낫겠지.
폰으로 내 음성만 서비스해주는 게 좋겠어.
그의 근시안과 내 근심을 용해하기에 적절할 거야.
초점을 자기에게로만 몰고 가다가
나 같은 것은 처참해지도록 몰각했으니까.
지금 내 머릿속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카페의 풍경이 흔들린다. 내 방의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남의 우울까지
보아줄 만큼 정신이 맑지를 못하니까.
* 벽에 금이 간 집(The house with cracked walls) : 폴 세잔 (Paul Cezanne)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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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2 ∽ 2013-01-06 오전 6:01.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3년1월5일-2(내가 모퉁이로 사라졌다가.hwp <원작>
= 시집_『카페, 가난한 비』(2013.02.12.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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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가상(2005-08-02. 광주시 광주역, 유동 스토리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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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수선화, 벽에 금이 간 집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실현됨이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서 “나”(여성 화자)는 불안하다. “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로 행위를 시도했는데, 세잔의 <벽에 금이 간 집>을 검색한 것이 “나”가 사랑에 실패한 결과로 이어졌다. “나”는 왜 <벽에 금이 간 집>을 검색한 것일까?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의 행위가 “나”를 망치는 길로 이끌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연상된다. 그런데 글의 구성 측면에서 살피면 이 검색 행위는 ‘복선’에 해당한다.
「수선화」는 화자의 뇌리에서 시공간과 사람들이 바뀌면서 흘러감으로써 영화의 장면들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무비즘 기법으로 구성되었다. 화자인 “나”는 의식의 흐름에서 ‘방의 화병’과 ‘수선화’가 먼저 떠올랐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카페의 풍경이 흔들”려서 이내 다시 ‘방의 화병’과 함께 ‘수선화’를 떠올려내고 독백을 흘려내면서 의식의 흐름을 접는다. “나”는 처음부터 “수선화”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 “나”는 방에서 수선화를 생각했다 →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 역으로 갔다. → (카페로 갔다) → “나”는 귀가하여 방에서 수선화를 생각했다.
수선화는 나르키소스와 관련 깊은 꽃이다. 나르키소스(Νάρκισσος, Narcissus), 나르시스 또는 나르시시스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에 등장한다. 나르키소소라는 낱말은 “잠(sleep) 또는 무감각(numbness)”을 의미하는(→ “그”의 ‘몰각’과 통하는) 나르케(ναρκη, narke)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메이니아스라는 청년이 청년 나르키소스(Narcissus)를 사랑하였지만 나르키소스는 그에게 매정하게 대했고 칼을 선물했다. 아메이니아스는 나르키소스의 집 앞에서 그 칼로 자살하면서 나르키소스가 짝사랑(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고통을 알게 되길 네메시스에게 빌었다. 훗날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됐는데, 입맞춤하려 하다가 그것이 자기 자신의 반사된 모습인 것을 알아차려 슬픔에 빠져 자살을 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수선화가 피어났다. 자기애(自己愛) 또는 자기 도취증이라고 번역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여기서 유래한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 ‘자존심’, ‘고결’, ‘신비’, ‘외로움’ 등이다.
그런데 글 「수선화」에서 ‘수선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1연에서 “나”는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고 “지금 내 머릿속엔 수선화들이 흔들거린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인터넷으로 세잔의 <벽에 금이 간 집>을 검색하였다. 1연은 ①“나”가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실현됨이 불투명한 상태에 있다는 것과, ②“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거나 짝사랑하고 있고 그 대상을 ‘수선화’로 상징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③“나”가 사랑이 이루어지면 좋고 사랑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중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2연은 그런 생각을 더욱 들게 한다. ‘∼라고 했지만’과 ‘∼라는 말은 안 했다’가 그렇게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한 이유를 “그가 딴말을 해서.”라고 밝혔다. 그러고는 ④“폰으로 내 음성만 서비스해주는 게 좋겠어./그의 근시안과 내 근심을 용해하기에 적절할 거야./초점을 자기에게로만 몰고 가다가/나 같은 것은 처참해지도록 몰각했으니까.”라는 생각에 이른다. 사랑으로 인한 아픔의 정서(우울이나 슬픔 등, 멜랑콜리)는 드러내지 않는다. ④는 “나”에게, “아메이니아스”가 “나르키소스”에게 한 행위를 21세기라는 지금 시대에 적절하게 변형하여 시도하겠다는, 즉 고통을 주겠다는 심산이 있음을 알려준 것일 뿐이다. “나”는 곧 ⓹“나는 남의 우울까지/보아줄 만큼 정신이 맑지를 못하니까.”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해버리니까.
그런데 글을 끝내는 마지막 말 “정신이 맑지를 못하니까”가 ‘(나의) 마음 또는 기분이 매우 혼잡하니까 → 수선하니까’로 해석되어 “수선하니까 수선화”라는 뉘앙스를 남긴다.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말했다고 하고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사전은 ‘수선하다’의 의미를 ‘①갈피를 잡을 수 없게 어지럽다, ②손보아 고치다’라고 설명한다.)
이 글은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상황을 시작하고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똑같은 말을 하고서 상황을 정리해버린다. 한데 이 글의 “수선화”를 ‘자기애’, ‘자기도취’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벽에 금이 간 집>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알아봤다. “나”는 왜 하필 <벽에 금이 간 집>을 떠올린 것일까? 이 그림에는 집과 나무가 있는 정원이 있지만 ‘수선화’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과적으로는 “나”가 시도한 사랑에 금이 갔지만, 이것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인생의 향방은 얼 수 없다는 것을 우연히 담아버린 행위이다. 1연의 수선화는 “나”가 ‘내가 사랑을 지향하여 만나고 온 사람 A’이다. 마지막 연의 수선화는 “나”에게 ‘사랑해주는 사람 B’이다.(1연의 ‘카페’는 ‘인터넷 카페’고, 마지막 연의 ‘카페’는 ‘커피를 파는 실재하는 카페’이다,) ‘그의 근시안과 내 근심’이라는 언어 변주를 담은 「수선화」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인생의 향방은 얼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남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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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2012-08-16
26세
그날 택시는 내 분홍색 옷을 태웠는데
그는 카페에 들어서는 내 옷을 유심히 봤다.
내 눈이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요,
라는 말에 그는 라식을 하지 말라고 했다.
벌써 1주일쯤 시간이 저 혼자 녹고 있다.
내 방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머릿속엔 수선화들이 흔들거린다.
인터넷으로 ‘집 벽에 금이’로 검색하고
눈이 피로해지도록 보았다. 세잔의 ‘벽에 금이 간 집’을,
블로그의, 카페의, 웹문서의 글 따위를.
역에까지 갔다가 사람구경만 하고 택시를
탔어요, 라고 했지만 선배 오빠 두 사람을
만났어요, 라고 했지만 역에서 나왔을 땐
사이렌이 울렸어요, 라는 말은 안 했다. 역에선
각각 사람 머리 위로 날아가는 세월을
보고요, 라는 말도 안 했다, 그가 딴 말을 해서.
문자메시지는 안 보내는 게 낫겠지.
폰으로 내 음성만 서비스해주는 게 좋겠어.
그의 근시안과 내 근심을 용해하기에 적절할 거야.
초점을 자기에게로만 몰고 가다가
나 같은 것은 처참해지도록 몰각했으니까.
지금 내 머릿속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카페의 풍경이 흔들린다. 내 방의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남의 우울까지
보아줄 만큼 정신이 맑지를 못하니까.
그날 네 눈 속에는 두 가지 색깔이 있다, 고 말했는데.
* 벽에 금이 간 집(The house with cracked walls) : 폴 세잔 (Paul Cezanne)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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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6 오후 8:59. 박석준-시집 최종본 2012년7월.hwp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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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12-06-25
26세
그 날 택시는 분홍색 옷을 태웠고
카페에 들어선 내 옷을 그는 유심히 봤다.
내 눈이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요
라는 말에 그는 라식을 하지 말라고 했다.
벌써 1주일쯤 시간이 저 혼자 녹고 있다.
내 방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머릿속을 수선화들이 흔들거린다.
‘집 벽에 금이’로 검색하고 눈이 피로해져도 보았다.
세잔의 ‘벽에 금이 간 집’을, 블로그의, 카페의, 웹문서의 글 따위를.
역에까지 갔다가 사람 구경만 하고 택시를 탔어요 했지만,
거기서 선배 오빠 두 사람을 만났어요 했지만,
역에서 나왔을 땐 사이렌이 울렸어요 말은 안 했다.
역에선 각각의 사람 머리 위로 날아가는 세월을 보고요 말도.
그가 딴 말을 해서
문자메시지는 안 보내는 게 낫겠지.
폰으로 내 음성만 서비스해주는 게 좋겠어.
그 근시안과 내 근심을 용해하기에 적절할 거야.
초점을 자기에게로만 몰다가 나 같은 건 처참해지게 몰각했으니까.
지금 내 머릿속을 사람들 만나는 카페의 풍경이 흔들거린다.
내 방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남의 우울까지 보아줄 만큼 정신이 맑지를 못하니까.
그날, 네 눈 속에 두 가지 색깔이 있다, 하였는데.
*벽에 금이 간 집(The house with cracked walls) : 폴 세잔 (Paul Cezanne)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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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5. 23:02.메. 박석준-시집(이은봉교수)-새 수정본-6월.hwp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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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 2005-08-02
26
내 눈이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요 했을 때, 그는 라식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날 차는 연보라색 옷으로 카페에 갔었다. 그도 내 옷을 유심히 봤다.
벌써 1주일쯤 시간이 저 혼자 녹고 있는데, 내 방 화병에 수선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 말만이 지금 내 머릿속을 흔들거린다.
눈이 피로해져 지칠 때까지
보았다. 글 따위를.
“이 세상이 낙원이므로 봉닌은 헛짓거리를 한다.”
라는 말을 누구에겐가 전해 주어야지. 혹 카페에서 별 궁금한 것 없이 만나더라도.
그는 역에까지 갔다가 사람 구경하고 카페에 왔다 했지만, 두 번씩이나 거기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했지만, 내가 역에서 나왔을 땐 사이렌이 울렸을 뿐이지. 역에선 사람들 각각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세월을 보고.
그러나, 그에게는 메시지 같은 건 안 보낸 게 낫겠지. 그는 초점이 자신에게 모아지기를 바라는 것 같으니까. 그는 초점을 자기에게로만 몰다가 처참하게 몰각된 적이 있었으니까, 아직은 먼저 내게 시선을 보내지 않을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전화로 내 목소리만 서비스해주는 게, 그의 근시안과 내 근심을 용해하기에 적절할 거야. 그는 아마 곧 우울해져 기타를 치겠지만, 나는 우울한 노래를 듣고 싶을 뿐이지. 기타 소리가 아니라.
그러나 기타 소리가 가까이 와 있더라도 난 사람 지나다니는 거리의 풍경 속에다 내 시선을 흩뿌리고 있을 테지. 나는 남의 우울까지 보아줄 만큼 정신이 맑지를 못하니까.
내 눈 속에 두 가지 색깔이 있다고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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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2. 06:16. 카페 가난한 비_26 (발상)
→ https://cafe.daum.net/poorrain/4Ps/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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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나르키소스 - 나르키소스 -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작(1658)
Narcissus poeticus subsp. radiiflorus.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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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 벽에 금이 간 집 (1892-1894)
Paul Cézanne - The house with cracked walls (1892-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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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주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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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_숲을 산책하는 남녀(or 두 개의 형상을 가진 덤불)_1890
Vincent van Gogh_Undergrowth with Two Figures (1890)
그림의 하부에 묘사된 식문은 ‘수선화’라고 유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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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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