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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비즘 (3)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 / 박석준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

나의 무비즘 (3)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 / 박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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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증이 와도 안대로 가릴 수도 결근을 할 수도 없다.

  교육관이 뭐냐고? 글쎄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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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

  조퇴하고 가게에 들른 중1 나는 서성거리다 집으로 갔다.

  어디 가서 얻어 온 거냐?

  집에 가서, 가지고, 왔어요.

  그럴 줄 알았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지. 그런데,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아서, 나는 심장이 뛰고 초조했다.

  허약한 애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시오.

  엄마가, 엄마의 목소리가 스며들자

  아버지가 밥 한 숟가락에서 몇 알 떼어 큰형 이름 적힌 편지봉투에 바른다.

  그러곤 갑자기 손을 잡아채어 불안하게 하면서 밖으로 걸음을 뗐다.

  우리 식료품 가게 앞 큰길을 건너 의원으로 들어갔다.

  의원에서 나오는 길로 아버지가 택시를 잡았다.

  나를 업고 올라가, 70년 봄 동산 위 정자에 앉혀놓았다.

  광주천과 무등산이 보이는 정자에 아버지가 서 있어서, 나는 불안한데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버지의 소리가 해 질 무렵에 귀를 타고 머리에 박힌다.

  1 후에 파산하여 아버지가 1974년에 서울로 갔다.

  큰형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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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아홉 살 다 지나가는 1976년 겨울, 걸음 걷다가

  쓰러지는 나를 큰형이 업어 서울 병원으로 데려갔다.

  팔로4징후*였다. 형이 각서를 썼다. 무슨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보인다. 기자라 한 사람이 물었고 오후에

  큰형이 가져온 신문에 해가 바뀌고 며칠이 지난 시간과

  국내 최초 성공, 내 이름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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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두 살 내가 느리게라도 걸을 수 있어 돈을 구하려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다 11월에 본 가판대 신문, 적힌 사건,

  큰형 이름. 눈물이 나고 내가 초라하게 여겨졌다.

  남민전* 사건으로 큰형이 투옥되었다!

  나는 부실하여 감당할 만한 일터를 먼 곳에서 구했다,

  스물여섯에. 교사가 되었으나 큰형의 일로 안기부에게

  각서를 써야만 했다. 13개월 후에 아버지가 떠났다.

.

  여인숙 일을 접은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일터로 갈

  사람을 깨운다. 그 후엔 나팔꽃 화분을 가꾸거나

  오후엔 절룩이며 팥죽을 팔러 나가실 텐데.

  새벽길에서 나는 7년 넘게 갇혀 있는

  큰형 얼굴을 떠올린다,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지향하는

  색깔로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생각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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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F(Tetralogy Of Fallot, 팔로4징후): 선천성희귀 심장병.

* 남조선민족해방전선: 19762월에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조직. 197911월에 종결. 박석률의 권유로 박석삼, 김남주 등이 가입. 이재문은 옥사하고, 신향식은 사형이 집행됨.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박석삼, 김남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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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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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3 ()

  2019-07-28(문학들 57)

  2020-03-04 (교정) = 시집본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2020.05.25.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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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1970., 1971, 1974.4.(민청학련)

  1976.12.30.(각서), 1977.1.4.(신문)

  1979.11.3.(체포), 1983.4.(각서). 1984.4.(사망)

  1986.11.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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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동기:

  (아픔, 파산, 수감, 사망, 가난 등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갖게 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생각(정직하게, 정의롭게, 감당할 만하게, 지향하는 색깔로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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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11:37 <원작=문학들본> (이 년 / 서너 걸음) =

문학들57, 2017 봄호(2019-08-30)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

 

 

  통증이 와도 안대로 가릴 수도 결근을 할 수도 없다.

  교육관이 뭐냐고? 글쎄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을 뿐.

 

  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

  조퇴하고 가게에 들른 나는 서성거리다 집으로 갔다.

  어디 가서 얻어 온 거냐?

  집에 가서, 가지고, 왔어요.

  그럴 줄 알았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지. 그런데,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아서, 나는 심장이 뛰고 초조했다.

  허약한 애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시오.

  엄마가, 엄마의 목소리가 스며들자

  아버지가 밥 한 숟가락에서 몇 알 떼어 큰형 이름 적힌 편지 봉투에 바른다.

  그러곤 갑자기 손을 잡아채어 불안하게 하면서 밖으로 걸음을 뗐다. 나는 우리 가게 앞 큰길을 건너 의원으로 들어갔다.

  의원에서 나오는 길로 아버지가 택시를 잡았다. 를 업고 올라가, 산 위 정자에 앉혀 놓았다.

  광주천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아버지가 서 있어서, 나는 불안한데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버지의 소리가 해 질 무렵에 귀를 타고 머리에 박.

  년 후 1974년에, 아버지가 집을 잃고 서울로 갔다, 큰형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열아홉 살 다 지나가는 1976년 겨울, 서너 걸음 걷다가 쓰러지는 나를 큰형이 업어 서울 병원으로 데려갔다, 4징후였다. 큰형이 각서를 썼다. 무슨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보인다. 기자라 한 사람이 물었고 오후에 큰형이 가져온 신문에 해가 바뀌고 며칠이 지난 시간과 국내 최초 성공, 내 이름이 실려 있다.

 

  스물두 살 내가 느리게라도 걸을 수 있어 돈을 구하려고 이곳저곳 찾아다니, 11월에 본 가판대, 신문 적힌 사건, 큰형 이름. 눈물이 날 듯하고 느끼는 초라한 마음. 민전 사건으로 큰형이 투옥되었다! 는 부실하여 감당할 만한 일터를 먼 곳에서 구했다, 물여섯에, 교사가 되었, 큰형의 일로 안기부에게 각서를 써야만 했다, 13개월 후에 아버지가 떠났다.

 

  어머니는 한진여인숙을 접고, 단칸방에서 일터로 갈 사람을 깨우고 그 후엔 나팔꽃 화분을 가꾸거나 오후엔 발을 절룩이며 팥죽을 팔러 나가실 텐

  새벽길에서 나는 7년이 넘어도 집에 오지 못하는 큰형 얼굴을 떠올린다,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지향하는 색깔로 시간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생각을 이어간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19762월에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조직. 197911월에 종결. 이재문은 198111월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198210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남주 이수일, 박석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관련자들은 형 만기 등으로 198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으며 2006년에는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 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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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장주선 소설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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