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 박석준
신 살구 같은 유동의 유월 밤비 속을 49살인
나는 걷고 있다. 불빛 흘리는 상점들이 비에 젖는데
돈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어서,
나는 은행 앞 우체통 앞에서
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케이크를 떠올려 가려버린다.
나는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 5만 원을 찾고는,
제과점 속에서
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쇼윈도 속 케이크를 돈 주고 사면서 가려버린다.
그럼에도 나는, 가난하여
나의 결여로 인해 조직에서 소외되어
전망이 흐릿한데도, 살아가려고 한다.
나는 퇴근하면, 순천 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를 탔고
도착하면 시내버스를 탔고 유동에서 내렸다.
그런데 오늘 나는 유동에 오자 유월 밤비를 맞고 걸었다.
사람들이 흘러가고 2층 카페 스토리가 흘러가고
불빛 흘리며 상점들과 돈과 차들이 흘러가는데.
전당포 같은 어두운 방 슬픈 눈이 다시 떠올라서,
방 안에서 어머니가 아파서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아서,
나는 결여가 있어서 괴로워서, 어리석어서,
신 살구 같은 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걷고 있다.
2021-03-21 (초고) ~ 2022-03-19 (완)
『시와문화』 2022년 여름호(2022-06-01)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2023-03-20)
『2023 오늘의 좋은 시』(푸른사상) 재수록(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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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작품의 화자는 “신 살구 같은 유등의 유월 밤비 속을” 걸어가고 있다. “불빛 흘리는 상점들”도 “비에 젖”고 있다. 화자는 걸어가면서 자신은 “돈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은행 앞 우체통 앞에서/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바라보다가 그것에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케이크를 떠올려 가려버린다”. 화자는 그와 같은 소극적인 행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 5만원을 찾고는,/제과점”에 들어가 “케이크를 돈 주고” 산다.
화자가 슬픈 눈의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자신이 가난할 뿐만 아니라 “조직에서 소외되”고, “전망이 흐릿”하고, “방 안에서 어머니가 아파서 곧 세상을 떠날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할지 막연해 밤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화자는 자신의 나이가 “49살”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아직 오십 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가 제과점에 들어가 케이크를 사는 것이나, 밤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2023 오늘의 좋은 시』(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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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유동에서 바라본 금남로와 무등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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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유동 기리에서 2005-07-31(48살) 오후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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